처음부터 이런 나를 꿈꾸지는 않았지만
한 작품의 제작비로 200억 원을 들이는 드라마가 늘어간다. 평균적으로 보더라도 요즘은 드라마 한 작품에 100억 원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다. 제작비가 커진 만큼 제작 현장의 여건도 개선돼야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급증한 제작비는 시청자의 시선이 닿는 곳부터 우선적으로 쓰인다. 주연 배우, 작가, 연출에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돈이 들어간다. 이후엔 영상 퀄리티를 결정하는 촬영, 조명 등 감독들과 장비, 미술 순서로 큰 제작비가 할애된다. 그리고 시청자의 시야가 가닿지 않는 곳에는 급증한 제작비가 무색하게 적은 돈이 쓰인다.
내가 촬영장에서 관리하던 제작비는 우선순위의 계약금이 모두 빠져나간 뒤 남은 돈이었다. 촬영 현장의 조건을 개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아끼기 시작하면 곧 누군가의 업무 환경이나 건강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돈. 제작 프로듀서는 돈을 쓰는 사람이고, 그 빠듯한 몇 푼을 아끼는 일이 업무의 중심이다. 현장에서 일할 땐 내가 아끼는 작은 단위의 돈이 촬영 현장을 얼마나 열악하게 만드는지 쉽게 잊었다. 아무리 제작비를 줄여도 앞 단에서 억 단위로 빠져나가는 돈을 메울 수 없다는 사실도 잊었다.
제작 프로듀서는 악마가 아니다
싸구려 모텔을 스태프들의 숙소로 잡을 때, "스태프들이 어디서 자든 무슨 상관이야. 대강 눈이나 붙일 수 있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은 촬영 일수와 제작비를 따져본 끝에, 방 하나에 4만 원이 넘으면 제작비가 빠듯해지고 2인 1실이 필수라는 계산이 나올 뿐이었다. 맛있는 야식으로 스태프들의 피로를 풀어줄 생각보다, 부식비로 쓸 돈을 얼마까지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식이다.
'촬영'과 '장거리 운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촬영 중에는 "잠도 못 자는데 먼 거리를 운전하면 위험하니까, 제작 봉고랑 기장님을 섭외해야겠다."라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기장님을 섭외할 때 수도권을 벗어나면 돈을 몇 배나 줘야 하고, 촬영이 길어지면 숙박비도 계속 쓰게 될 테니 차만 빌려서 직접 운전을 해야겠다." 따위의 판단을 한다. 그러다 보면 졸음운전으로 풀 숲에 처박혀있는 차 안에서 눈을 뜨게 되는 거다. 에이 설마, 싶지만 풀숲에서 눈을 뜬 당사자가 해준 이야기다.
제작 프로듀서는 악마가 아니었다
촬영이 지연될수록 제작비는 늘어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촬영은 대본의 모든 장면을 찍어야 끝난다. 16부 드라마를 기준으로 대략 100회차 정도 촬영을 나간다. 제작비 예산은 평균적인 촬영회차(100회차)를 기준으로 책정된다. 만약 100회차를 기준으로 제작비 예산을 책정해두었는데, 촬영이 120회차가 되면, 20회차 만큼의 촬영은 곧 제작비 예산 초과를 의미하게 된다. 촬영이 늦어지면 촬영 일수가 늘어나고, 이는 예산 초과를 의미한다. 미촬영씬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촬영 회차가 90회차를 넘어가게 되면 제작 프로듀서는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럴 때 사고가 발생하기 쉽다. 제작 프로듀서가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촬영을 밀어붙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촬영 일수를 초과할 때 말고도 제작 프로듀서가 촬영을 강행하는 경우도 있다. '돈이 많이 드는 씬'을 찍을 때다. 보조 출연자가 많이 필요할 때(축제, 결혼식, 시장 등을 배경으로 한 군중 씬), 장소 섭외비가 비쌀 때, 화재 장면처럼 세팅과 특수 효과에 큰 비용이 필요할 때가 그렇다. 이럴 때 제작 프로듀서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다. 촬영 시간이 길어질 작은 실수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나 그렇듯, 꼭 이럴 때 사고가 터지고 실수가 나온다.
화재 장면을 촬영할 때는 특수 효과팀(특효팀이라 주로 부른다)이 촬영 현장을 통제한다. 제작팀은 화재씬 촬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확인하고 준비하는 역할을 맡는다. 제작 프로듀서 시절, 나도 화재씬을 경험해봤다. 몇 주 전부터 미리 촬영 장소에 가서 감독, 연출팀과 촬영 순서와 동선을 짰다. 관할 소방서에 연락해 촬영 협조를 요청하고, 특효팀과 화재 규모나 화재 진압 방안을 계획했다. 화재 현장에서 쓸 수 있는 마스크, 헬멧, 장갑, 소화 도구 등 갖가지 준비물을 모두 챙기고 대망의 촬영 날이 됐다. 카메라팀과 배우들이 촬영 동선을 맞추고 최종 리허설을 마쳤다.
촬영이 시작됐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배우들과 촬영팀은 모두 약속된 대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딱 한 팀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 팀이 특효팀이었다. 그들은 불을 끄지 못했다. 특효팀의 다급한 목소리는 곧 고함과 욕설로 바뀌었다. 촬영 현장은 순식간에 화재 현장이 되었다. 당시 나는 화재 현장으로 바뀌어가는 촬영장 한가운데 서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고민했다. 대기 중인 소방관분들께 화재 진압을 요청해야 할까-그렇게 되면 화재는 완벽하게 진압되겠지만, 촬영 세팅도 모두 무너질 게 뻔했다-, 아니면 소화기를 가져와서 촬영팀 수준에서 화재를 진압해야 할까, 그런데 특효팀이 분명 분말 소화기는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고(도포된 분말로 인해 촬영 세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이산화탄소 소화기를 사용하라고 했는데 이산화탄소 소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눈앞에 보이는 분말 소화기를 스태프들에게 나눠줬고, 불을 껐다.
그리고 된통 욕을 먹었다. 제작 프로듀서씩이나 돼서 분말 소화기로 불을 끄는 게 말이 되냐, 왜 특효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냐, 촬영 세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 등등. 다행히도 내 선배들은 불을 끄느라 뛰어다니고 여기저기서 욕도 먹고 돌아온 후배를 다그칠 만큼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눈에 훤히 보이도록 제작비를 걱정하긴 했지만. 그날 나는 한참 동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감정이 드러나는 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렇다면 어떤 얼굴로 이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건지 결국 답을 내리지 못했다.
프로듀서가 악마를 입는다
촬영을 모두 끝낸 뒤 정산을 하다가 울컥 화가 난 적이 있다. 스태프의 택시비를 제작비로 처리한 것을 두고 지원 부서에서 촬영에 불필요한 지출이었다고 지적했을 때였다. 그 영수증에 적혀있는 숫자를 돈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화가 났다. 그 숫자는 돈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촬영한 스태프에게 보장해줘야 했던 수면 시간이었고, 휴식시간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분노는 나를 향한 감정이기도 했다. 촬영이 한창일 때에는 나도 지원 부서와 다르지 않게 판단했을 것이다. 촬영 중에 제작 프로듀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니, 나는 못했다.
이 글의 제목은 현실과 다르다. 악마는 프로듀서를 입지 않는다. 프로듀서가 악마를 입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작비와 촬영 일수에 시달린 제작 프로듀서는 악마가 된다. 의사 결정의 우선순위에 돈을 놓게 될 때, 제작 프로듀서는 쉽게 옳지 않은 판단을 내린다. 추운 밤 물에 빠진 연기를 하던 대역분이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는 동안 시계를 보게 된다. 건물 옥상에서 촬영 중에 고소공포증으로 울고 있는 배우를 보고, 배우가 덜 됐다고 생각한다. 내가 촬영하고 있는 것이 '드라마'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 드라마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그 일을 빠르고 저렴하게 해내는 일만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런 내가 싫었다.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는 10편 정도면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글을 쓰다보니, 2년이 채 되지 않는 그 시절 동안 겪었던 이야기와 그 안에서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번 글까지 브런치 북으로 묶어서 발행하지만, 남은 이야기들은 매거진을 통해 이어나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