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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Oct 14. 2018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나는 삶이 뭔지 모를 때 글을 썼습니다. 이젠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어느 평범한 금요일 오후. 기분전환 겸 이태원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에 들러 읽을만한 책을 찾다가 우연히 마주친 문장이었다. 삶의 의미를 알기에 이제는 더 이상 쓸 게 없다고? 혹시 내가 잘못 읽었나 싶어 다시 확인해봤다. 그래도 틀림없다. 뭐 이런 거만한 작가가 다 있을까, 하고 보니 오스카 와일드였다. 과연 와일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일드는 홀로 우뚝 솟은 섬과 같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바다 따위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고고한 섬. 자신의 글이 영원한 예술이 되길 꿈꿨던 외로운 섬. 그러나 와일드의 말년은 비참했다. 동성애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년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출옥했지만, 고국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병에 걸린 채 생을 마감했다. 쓸쓸했던 예술가는 글을 쓰는 동안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는 찾지 못했던 예술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딴섬 역시 대지의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게 글이란 백조처럼 잔잔한 수면 위에서 홀로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바닥을 딛고 선 삶이다. 



삶이란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하지만 살다 보면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듯, 날 것 그대로의 뜨거운 덩이를 토해내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와일드는 글쓰기가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에게 글이란 삶을 돌아보는 방법에 가깝다. 그러므로 내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성찰에 가깝다. 텅 빈 종이에 글을 쓸 때, 종이는 내 삶의 낱낱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거울에 내 몸뚱이를 비춰볼 때면 나는 내 모습이 마치 커다란 만년필과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만년필의 펜촉이 번뜩이고 핏물처럼 검붉은 잉크가 마구 흘러나오면 빈 종이에 나와 닮은 무언가가 쓰인다. 글이 얼마나 선명하고, 뜨겁고, 풍성할 수 있는지는 순전히 만년필에 달린 문제다. 글은 글쓴이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고민이 없는 삶은 펜촉을 적실 잉크가 부족하고, 온갖 몸짓으로만 가득한 삶에는 글을 쓸 여백의 공간이 없다. 그래서 분주한 삶은 글을 잃어버리기 쉽다. 



당장 오늘 하루가 바쁘다는 핑계로 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여유가 생기면 꼭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살면서 글을 쓸 만큼 여유로운 시간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온통 업무로 가득했고, 그게 아니라면 여가 활동으로 분주했다. 나는 인생의 모퉁이에서 마주쳤던 질문들을 그렇게 외면하고 있었다. 삶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답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있다. 이를테면 삶의 의미와 같은 진부하고 무거운 문제. 이별 혹은 죽음처럼 보고도 못 본 채 고개를 돌리고 싶은 문제. 나는 이런 문제들에서 도망치듯 살았다. 그런 내게 분주함은 좋은 핑계였고, 어떤 고민도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나는 더욱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내게 묻고 있었다.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무엇이 옳은 방법인지',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은 정당했는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은 뭔지',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 중에 내가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을까? 무엇 하나 자신할 수 없었다. 답을 하든 못하든, 질문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나는 그림자의 무게가 너무 괴로워,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백사장에 떠밀려온 상어처럼 숨이 가빠 펄떡이며 몸부림치던 나는 문득 지금이야말로 글을 써야 된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소설의 모든 문장들이 단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쓰여지듯 내가 써온 모든 글들은 결국 내 삶의 의미를 위한 것이었다. 인생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본질적인 의미에 굶주려 있었고, 내내 만성적인 공복감에 시달렸다. 타인의 글을 통해 내 삶의 의미를 찾을 만큼 나는 간절했다. 허기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주워 읽었지만, 무엇으로도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타인의 글은 아무리 애를 써도 내 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크눌프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메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사랑의 이야기도, 기존의 가치관을 단번에 깨뜨리는 철학자의 잠언도, 아픈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위로의 글귀도 결국 내 것이 아니다. 설사 타인의 글에서 어떤 의미를 맛보더라도, 결국 내 의미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빛을 잃고 만다. 타인의 글을 빌려 내 멋대로 채색한다 해도 어떤 일반적인 의미가 개인의 고유한 의미를 적확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다. 심장을 관통하고 들어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들은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짜인 함에 보관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살면서 자신이 감각하는 문장들을 온몸으로 써 내려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과 단편적인 생각들을 솔직하게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진실한 글을 쓰는 동안에 나는 비로소 내가 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묻어둔 속내조차 죄다 고백할 수 있는 밀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 그곳에서 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고 가장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대화는 뱀이 해묵은 허물을 벗는 과정과 유사하다. 허물 속에 감춰진 본체는 그렇게 글이 되어 바깥으로 나왔다. 글은 무심코 외면해왔던 나의 조각들을 빠짐없이 다 드러내고 객관화할 수 있는 도구이자, 그 자체만으로도 삶에 대한 세심하고 은근한 애정을 표현하는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온 궤적들을 하나둘씩 적다 보면 내가 지닌 연약함에 좌절하기도 하고 추한 이기심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욕망하는 나를 발견하면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글을 쓰는 행위가 내게 무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듯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나를 위로한 것은 다름 아닌 내가 땀과 눈물로 적어온 문장들이었다. 삶이 내가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지붕처럼 느껴질 때, 나는 글을 쓰면서 삶이라는 지붕을 떠받칠 기둥을 축조해온 셈이다. 그러나 그 기둥이 곧 힘없이 무너진다 해도 결코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허무하고 권태로운 진자 운동에서 의미라고 불릴만한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고 삶에 대한 여전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텅 빈 종이에 무엇이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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