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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Nov 29. 2018

관계의 본질

그릇이 아닌 그릇에 담긴 무엇에 대하여



나는 고약한 버릇이 하나 있다. 사람을 물과 그릇에 빗대는 것이다. 이를테면 두 손으로 감싸 쥐어야 할 정도로 큼직한 머그잔에 담긴 따뜻한 밀크티라든지, 차가운 유리잔 속에서 열정을 빛내는 레드와인, 금테를 두른 우아한 자기에 담겨 있으나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미는 오물. 심심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 버렸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이 사람은 어떤 그릇에 담긴 어떤 물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속으로 깜짝 놀란다. 사람을 그릇에 담긴 물이라고 멋대로 상상하다니. 아무리 혼자서 하는 상상이라지만, 이렇게 무례하고 황당한 상상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이 못된 버릇을 못 고치는 것을 보면 혹시나 어떤 쓸모라도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면 뭐가 있긴 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진정한 쓸모와 무쓸모를 손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 쓸모랄까. 역시 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사람을 물과 그릇으로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그릇에 의지하여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릇에 기반한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그릇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저마다 그릇에 의지한 채로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외모나 유명세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재력일 수도 있다. 그저 살아가는데 쓸모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릇이 될 수 있다. 반면 사람 본연의 모습은 흐물거리는 액체처럼 나약하다. 만약 단단히 고정된 틀이 없다면 금세 흘러내리고 말 것이다. 자신을 표현하고,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신만의 그릇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은 종종 그릇이 곧 본질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래서 그릇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그럴수록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그릇에 담긴 물이 썩어서 악취가 나는 줄도 모르고 더 고급스러운 그릇을 갖기 위해 애쓴다. 또한 그들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따듯한 성품을 단지 허름한 그릇에 담겨 있다는 이유만으로 업신여기기도 한다. 같은 말이라도 성공한 사업가가 하면 귀를 기울이고 볼품없는 사람이 하면 무시한다. 같은 글이라도 유명한 교수가 쓰면 주의 깊게 읽지만 이름 없는 학생이 쓰면 대충 넘긴다. 부끄럽지만 모두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그릇을 먼저 살피고 있는 내 꼴이 아주 우스웠다. 나는 생각했다. '정작 그들이 지닌 내용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데 나는 왜 그들을 달리 대했을까?' 어쩌면 나 스스로도 좋은 그릇이 되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내용이야 어찌 됐든 눈에 보기에 좋은 그릇이어야 한다는 강박. 나는 그런 강박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였던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그릇은 쉽게 보이는 반면, 그릇에 담겨있는 물은 짐작조차 어렵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보통은 사람을 판단할 때 당장 눈에 보이는 그릇을 기준으로 삼기가 쉽다. 그러나 그릇을 보는 것은 쓸모를 따지는 행위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부유한지, 능력이 뛰어난지, 높은 지위에 있는지, 유명한지, 좋은 차를 소유하고 있는지, 얼굴이 예쁜지 등의 여부가 된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과 기준을 만족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판단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릇을 기반으로 한 관계는 그릇이 깨지면 언제든 무너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그릇이 아니다. 그릇에 담긴 물일 뿐이다. 관계의 본질 역시 그릇이 아니라 물에 있다. 만약 상대방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서로 사귐에 있어 그릇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과 사람이 사귄다는 것은 서로가 지닌 물을 함께 나누어 마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지닌 물을 함께 나눌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서로의 그릇이 다 깨지고 볼품없게 변해도 변함없는 유대를 원한다. 금이 간 그릇에서 새어 나오는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을 원한다. 서로의 치부와 흉터에 대해 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신뢰의 건축을 원한다. 그런 관계만이 나를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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