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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Nov 13. 2018

아버지의 선물



아버지와의 추억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중에도 내게 특별한 추억이 하나 있다. 어렸을 때 한번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낙엽의 빛깔이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지고, 나무는 앙상하게 메말라가던 가을과 겨울 사이의 어느 날, 나는 심한 독감으로 앓아누웠다. 약을 먹고 하루 종일 누워있었지만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열기는 더욱 맹렬하게 들끓었다. 아버지는 두통과 고열로 신음하는 나를 차에 눕히고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하필 주말인 데다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어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아야 했다. 



차는 텅 빈 도로를 질주했다. 잃어버린 새끼를 찾아 헤매는 짐승마냥 헤드라이트를 부릅뜬 채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몸에 가득한 열기를 식히려고 차가운 창가에 얼굴을 기대었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펄펄 끓는 내가 뜨거운 숨을 내쉴 때마다 차창에는 반투명한 김이 서렸다 사라지곤 했다. 그 모습이 꼭 피자마자 금방 시들고 마는 꽃, 혹은 불행을 속삭이며 웃는 유령의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 위에 가득한 어둠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어느새 차 안은 온통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엔진만이 낮게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그 소리가 겁에 질린 짐승의 비명으로 들렸다. 



열은 점차 심해져만 갔다. 나는 머릿속이 벌써 녹아내리는 기분이었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겨우 숨을 쉬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그조차 버거웠다. 입술은 반쯤 벌어져 그 사이로 힘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엑셀을 더욱 힘껏 밟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뒤따라오는 차가 있었다. 경찰이었다. 흐리멍덩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지만 그 장면만큼은 또렷하다. 아직 어렸던 내게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무서운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차를 세우자 경찰이 다가왔다. 



"선생님, 규정속도위반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들 녀석이 아파서요."



아버지는 늘 그렇듯 부드럽고 정중한 말투로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누구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나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경찰관은 뒷좌석에서 끙끙 앓고 있는 나를 보더니, 괜찮으니 얼른 가보시라고 말했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이미 열로 들끓는 몸속에서 무언가 다른 느낌의 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표정을 똑똑히 봤던 탓이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아버지는 언제나 차분하셨고 좀처럼 흥분하는 법이 없으셨다. 그래서 아버지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하실 줄 알았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얼굴에는 당황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그렇지만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한 아버지의 표정은 내 마음에 가득했던 걱정과 불안을 다 녹여 없애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의 신음을 들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는지. 



병원에서는 엉덩이에 주사를 놓고 며칠 분의 약을 처방해줬다. 의사 선생님은 금방 괜찮아질 거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금방 괜찮아질 것이고, 그렇기에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미 괜찮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주사가 조금 따끔했던 탓에 눈물이 찔끔 났을 뿐이다. 



자식이라고는 하나뿐이었던, 그래서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젊은 아버지에게 어린 자식의 아픔은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러나 돌아보면 나는 그 모습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나의 아픔에 대해 가슴 아파하시던 그 모습이 내게 위안이 된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흔들림 없던 마음을 뒤흔들 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던 것도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간은 쉼 없이 흘렀고,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났다. 내가 자란 만큼 아버지는 작아지셨다. 이제 세월 앞에서 신음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아프고 괴로울 때 그 곁을 지키고 싶다고. 아버지가 그러했듯 나도 아프고 쓰라린 표정으로 함께 울고 싶다고. 그래 봤자 그 깊은 사랑을 다 갚을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받은 사랑의 십 분의 일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소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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