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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Jul 09. 2020

사라진 날들과 사라질 날들

나의 오늘을 내가 아니면 대체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는 어느 여름밤.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다가 문득 아파트 단지를 가득 메운 고요함이 꼭 눈으로 뒤덮인 겨울 숲 같다고 생각했다. 높은 건물이 나무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소리라도 지르면 쌓인 눈이 쏟아져 내릴 듯한 고요한 콘크리트 숲. 지금 눈이 내린다면 퍽 어울릴 것 같다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눈이 내리는 장면을 좋아한다. 굵은 눈발이 펑펑 쏟아지고 세상 모든 색들이 하얗게 변하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포근해진다. 창문가에 앉아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며 눈이 내리는 모습을 잠잠히 감상하는 것. 그것은 내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눈이 내리는 장면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뒤덮는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초월적인 메시지가 마음에 울린다. 그것은 마치 잊고 있던 오래된 진실과도 같다. 생명을 지닌 저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목청껏 외치지만 죽음 앞에서 그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자랑스레 서로의 업적과 성취를 뽐내지만 결국에 인생이 자랑할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이 인생을 하얗게 뒤덮을 것이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면 걸어온 발자국은 모두 눈에 덮이고, 결국 어떤 자취도 남지 않게 되는 허무한 과정. 그것이 인간의 삶이며 삶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무위와 침묵이 존재한다. 아무리 부인해도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마치 하늘로 우뚝 솟은 나무의 존재를 죽어서 단단하고 어두워진 심재가 지탱하고 있듯, 생기와 온기가 가득했던 어제의 날들은 매일같이 죽고 단단한 줄기가 되어 오늘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죽어가는 중에 있음에도 이미 죽어버린 날들을 자랑하기도,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었다. 모든 날들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가 살아있는 순간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지극히 찰나의 순간일 뿐이며, 최후의 하루가 숨을 죽이는 순간 그마저도 고유한 의미를 상실하고 지극히 보편적인 풍경으로 남게 되리라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발걸음이 하얀 눈으로 뒤덮이고 나면, 인간이 마침내 달성하게 되는 단 하나의 업적은 무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헤아릴 수도 없이 무수한 인생이 그랬듯 나도 침묵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전부터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거대한 침묵. 그 거대한 공백 앞에서는 업신여길 만큼 하찮은 인생도, 우러러볼 만큼 대단한 인생도 없다. 사라진 날들과 사라질 날들이 있을 뿐이다. 짙은 공허함을 가득 안고도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있는 나무와 같이 내가 매일같이 해야 할 일은 사라질 날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게 가장 의미 있는 방식, 가장 진실한 태도로 하루를 사용하는 것이다. 한순간 자욱했던 안개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 허무한 날들을 내가 아니면 대체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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