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패러다임에서 공유의 패러다임으로
선물에 꽤 진심이다. 기념일 세 달 전부터 선물 후보를 여럿 떠올리는 습관은 물론이고,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무쓸모의 예쁜 것들로 마음 전할 기회 삼아 보기도 한다. 선물 받는 이가 만족하면 좋겠지만, 선물이 대가가 없는 호의라고 해서 반드시 환영받을 이유는 없다. 선물하기 전에도 일련의 질문이 필요한지 모른다. 상대와 나의 관계는 어떤가? 서로의 상황과 형편은 어떤가?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줄 것인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 것인가,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줄 것인가? 여러 질문을 거칠 수록 나보다 상대를 생각하는 선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가 되기까지
정체 모를 썩은 내와 검은 연기가 파란 하늘을 가렸지만 그날 아침 나는 꽤 기대에 차있었다. 슬럼가에서 쓰레기 분류 작업을 하는 아이 세 명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쓰레기장 한 구석 천막에 자리 잡고 앉아 아이들과의 대화를 미리 그려보았다.
‘아이들이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건 뭘까? 친구들을 만나고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학교에 가는 걸까? 조금 더 나은 일자리로 옮길 수 있게 직업훈련을 받는 걸까? 아니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조금 더 적당한 돈을 버는 걸까, 아니면 부모님이 일자리를 얻는 걸까?’
햇살에 못 이겨 오래 찌푸려온 얼굴 셋을 마주 보고 앉았다. 그들의 여정을 다 듣기에 한 시간은 짧았다. 마침내 아이들 입에서 나온 말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요’ 같은 뻔한 말이 아니었다. 슬럼가의 쓰레기장에서 몇 년간 일 해온 아이들에게 다시 학교에 돌아가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거리가 멀거나 돈이 없는 물리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장애물이 더 컸던 모양이다.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졌을 때 선생님께 도움 대신 꾸중을 받는다거나, 또래에게 놀림을 받는다거나, 가난이 파생한 차별과 불편한 상황에 처하기를 수차례, 그렇게 아이는 담담하게 말한다.
‘쓰레기 더미 속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많아요. 쓰레기 속에서 세상을 배워요. 학교에 안 가도 괜찮아요.’
이렇게 말하는 아이 앞에서 ‘아니야,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게 좋은 거야’라고 주저 없이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는 꽤 많은 순간 누군가에게 당장 필요해 보이는 해결책을 쥐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본인이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결국 본인이 가장 잘 알 수 있다. 곁에서 같은 결의 시간을 보내며 나의 뇌피셜이 아닌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원하는 변화를 상상하게 하고 이끌어 줄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아는가
미얀마 양곤은 한 때 나에게 꽤 익숙한 출장지였다. 사업 차 머무르고 있을 때 현지 가이드 한 명을 소개받았다. 흔히 한국인의 머니 파워를 맛본 전문 여행가이드라기보다 한국어를 배워 이제 막 통역에 발을 들인 진지한 청년이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한국 손님들은 호화스러운 호텔에 짐을 풀었고, 현지 청년은 주변 숙소를 찾아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일행 중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짐을 들고 로비를 나서려던 그 청년을 붙잡았다. 그리고 같은 호텔에 머물도록 권했다. 그는 일정 내내 그랬던 것처럼 웃는 얼굴로 부인했지만 몇 차례 강권하는 분위기에 결국 감사하다며 그날 밤 손님들과 같은 호텔에 묵었다.
찰나의 순간 내가 느꼈던 불편함은 일의 결과를 떠나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미묘한 일방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온갖 모난 생각들이 치솟았다. ‘다른 손님들이 낸 돈으로 왜 본인이 인심 쓰는 거지, 일급 호텔이니 현지 사람이 이런 데서 머물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오만한 게 아닌가, 그것보다 제안을 반길지 아닐지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았나….’ 생각의 길이 한쪽으로 잔뜩 확장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그 청년이 호텔 방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상상 한 방에 머릿속 단상들이 펑, 공중 분해되었다.
각자의 눈으로 바라본 결핍, 작은 목소리를 대변하는 권력, 손에 잡히는 통계. 이것들이 과연 자원을 전달하는데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을까?
1. 학교 건축과 교육 서비스
2. 보건소 건축과 의료 서비스
3. 식수시설 구축
4. 정부 거버넌스 개선
위에 나열한 것들은 흔히 한 국가의 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로 꼽힌다. 개인의 신념과 선호에 따라 한 개의 정답을 점찍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나마 정답에 가까운 게 있다면 그곳에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변화일 것이다.
현장에서 수 없이 많은 욕구들을 만나고, 채워져야 할 필요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필요가 이역만리 떨어진 후원자에 도달되고 진짜 채워져야 할 것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재단되는 걸 경계하는 이는 드물어 보인다. 일차적으로는 사무실에 앉아서 제안서를 쓰는 이나, 이차적으로는 그 제안서에 후원하는 이가, 보기 좋은 문서와 좋은 의도를 맹신하여 배를 산으로 보내고 만다.
우리 회장님이 ○○에 꽂히셔서요
비영리기관에서도 대표의 관심사에 따라 경영 방향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은 비일비재했다. ‘회장님이 ○○에 꽂히셔서요, 이사님이 △△전문가 셔서요.’ 하는 이야기는 수화기 너머 어디서나 들렸다. 리더 한 사람의 영향력이 큰 소규모 기관은 더 휘둘리기 쉬워 보였다. 그렇다고 규모가 큰 기관이 한 사람의 고견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치열한 모금시장과 생존을 위한 경영 논리로 최대한 후원자의 욕구를 맞춰야 했다.
글의 초입에서 쓴 ‘선물’이라는 표현은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기부 인식을 빗대었다. 후원자의 너그러운 이타심으로 자원을 기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생각과 그 도움의 결과를 통제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아직도 깨어져야 할 벽이다. 도와주면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현장에서 아직도 많은 NGO들은 누군가의 요구로 물건 배분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는다.
과연 한국에서 기부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선물의 패러다임에서 공유의 패러다임으로 바꿀 수 있을까? 후원자는 일회성 시혜가 아닌 자원을 공유하는 입장에서 현장을 인내심 있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모금부서는 눈앞의 목표를 양적으로 달성하려는 노력 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빠짐없이 대변해 후원자의 눈높이를 높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현장의 바람이 담기지 않는 사업이라면, ‘어떤 기관은 이렇게 해준다는데, 여기는 왜 안 돼요?’라는 잠재 후원자의 간 보기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배짱도 필요하다. 사업부서는 그만큼 충실하게 현장 사람들의 목소리를 옹호하고, 변화를 촉진하고, 진행 과정을 공유하는 책무에 부지런해야 할 거다.
누군가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 아래서 일하기란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원래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으니 당장 눈에 보이는 도움을 주는 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연속성과 일관성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주어지는 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하더라도, 장독 벽에 붙어있던 개구리에게 목숨을 살릴만한 물기였다면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을 수 있다. 근본적인 시스템 구축을 지원하는 게 더 중요한지, 아니면 당장 눈에 보이는 우물 하나 파기가 더 중요한지 따지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논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할지 모른다. 결국 변화를 위해 무엇이든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