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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and There : 난민과 이주민

일반화된 타자들은 거울과 같아서

by 사야

평소처럼 늦잠으로 여유 부린 주말이 아니었다. 경기도 외곽으로 가는 교통편을 찾아 출근하듯 집을 나섰다. 낯선 골목에 들어서자 낮은 건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빠른 눈으로 그곳 풍경을 살폈다. 어떤 장소인지 본다기 보다 곧 만나게 될 사람들이 어떤 공기로 그 공간을 채우고 있을지 더 궁금한 터였다. 안을 짐작할 수 없는 붉은 벽돌 주택에 알루미늄 문을 열고 들어서니 노란 장판이 깔린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가에 모여 앉은 한 무리가 보였다. 마치 어린 시절 할머니집이나 이웃집에 사람들이 모여 앉은 모양을 떠올리게 했다. 어른과 아이가 들쑥날쑥 모여 앉아 알 수 없는 웃음과 대화를 섞고 있었다. 그날은 기관 연구 차 난민 공동체를 방문한 날이었다.




반대니까 반대, 그냥 반대


국제개발 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속한 커뮤니티가 극히 소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서늘했던 순간은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대중들의 날 선 생각을 마주할 때였다.


수년간 난민과 이주민이 이슈화될 때마다 주요한 반응을 모니터링해 보면 크게 경제와 안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략 다음과 같이 세분화할 수 있었다.


1. 악의 근절을 원한다고 믿는 사람들 ― “왜 다른 나라에서 온 불법 이주민을 도와야 하나요?”
2. 먼저 규정돼 있던 ‘우리’의 범위를 넓히지 않는 사람들 ― “난민을 도울 바에 우리나라 ○○○을….”
3. 예수나 마더 테레사 정도의 지극한 희생정신과 사랑이 있어야 공생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 ― “그렇게 들이고 싶으면 너희 집에 먼저 데려가라”
4. ‘유럽의 실패’에서 배우기보다 이를 회피의 증거로 채택하는 사람들 ― “다른 선진국들이 이주민과 난민 제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5. ‘우리’라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 건수와 다른 곳에 잘못 쓰이는 수많은 세금은 과소평가하는 사람들 ― “범죄로부터 안전, 우리 세금, 그들로부터 다 지켜내야 한다”


한국에서 접하게 되는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은 그 논리가 흔히 민족주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친한 지인 중에도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넘어 적대감을 품은 이들이 있었다. 나의 지인들은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를 수 있지’라며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듯, 저녁 밥상 위 안줏거리 정도로 넘길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이후에도 한동안 그들의 눈을 오래도록 마주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반대편에 있는 소외된 이들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더 두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차별받고 있는 이들에게 나 또한 세상이 보내는 매서운 눈길을 그대로 흘려보내기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이성과 감정의 허점


불법 체류를 논하기 이전에 합법의 기준이 타당한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이 현실을 충분히 담지 못한 것을 불법 이주민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계속되어 왔다. 1982년의 미얀마 시민권법Myanmar citizenship law이 대표적인 예시다. 제도와 체계 안에 담기지 못한 ‘비공식 민족’이 있었고, 이후 민족 간 갈등의 불씨를 일으키게 된 건 지금도 뼈아프게 유효한 교훈이다. 사회가 포용적이지 못한 죄를 특정 집단에게 뒤집어씌우고 이미 충분히 평화롭고 정상적인 지금의 환경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주류사회는 말한다. 모든 차별과 배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체가 아닌 자국과 자기 이익 중심인 구조에서는 지구촌이나 세계시민이라는 단어를 감히 꺼낼 수 없다. 다른 국가나 누군가와 사이를 벌려놓고 월등함을 느끼기에만 만족할 거라면 OECD 가입국이나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은 내려놓는 게 나을 것이다. 다른 선진국도 실상을 겪어보더니 이주민과 난민을 배척하더라며 선진국이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린다고 믿는 척하면서, 정작 그들이 우리에게 취하는 이기적인 행태에 분노하고 조롱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낼 뿐이다.


흔히 난민을 옹호하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 되어버리지만, 실제 내면의 동기를 살펴보면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지배되어 벽을 쌓는 사람이야말로 비이성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사실과 통계에 근거해 정성스레 설명해도, 최후 방어 수단으로 남아있는 ‘안전과 경제’ 논리의 벽은 두려움이라는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세워져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의 본질이 얼마나 막연한 것인지는 아직 공론장에서 다루어진 적이 없다. 감정을 비판하고 이성을 옹호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저 상대의 언어를 빌려 본다면 비이성에 이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신경 쓰는 이유


국제개발에서 난민과 이주는 중요한 이슈다. 인도적 상황과 연결되기도 하고 인권 보호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아시아에서는 주로 경제적 소득을 위해 이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국가의 정치 불안정, 민족 분쟁, 자연재해 등에 취약한 저개발국은 여전히 많은 난민과 이주민의 송출국이다. 상대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는 우리나라로 와르르 몰려와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던 중 아프가니스탄과 미얀마에서는 더욱이 아프고 힘든 일을 겪었다. 생명을 위협당하고 존엄을 짓밟힌 사람들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난민과 이주민을 자처하고 만다. 결국 그들의 아픔이 바람에 실리고 파도에 떠밀려 우리에게까지 와닿는 것은 아닐지, 난민과 이주민은 우리가 더 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기어코 코앞에 당도한 것이 아닌지, 생각을 걷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국제개발은 난민과 이주민 이슈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대응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보다 가까운 곳에서 직접 마주했던 난민들은 난민 꼬리표가 붙기 이전에 누구보다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맡겨진 일을 착실히 해나간 ‘사람들’이었다. 두 눈이 똘망한 아이들은 제 나잇대 놀이를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안전하고 행복하게 생을 이어가고 싶은 지극히 평범한 욕구가 있는 ‘인간들’이었다.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은 없어요


국제분쟁취재전문 김영미 다큐멘터리 PD는 이역만리에서 일어난 재난 상황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데는 자기가 만나 본 외국인의 범위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사회과학자들도 줄곧 이야기하듯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품게 되는 데는 ‘노출 빈도’가 지대한 영향을 준다. 우리는 평소에 잘 보지 못한 이질적인 것에 경계심이나 적대감을 품기 쉽다. 한 배우가 난민들을 만나고 쓴 책의 제목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은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와 ‘우리사회’라는 기존 정체성에 뿌리 깊게 속해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낯설거나 그저 불편함을 주는 연예인의 정치적 행보로 여겨지는 듯했다.


자신이 소유한 이해와 경험이 아닐 때, 공감은 성립되지 않는다. 미디어가 아닌 일상에서 난민과 이주민을 만나는 사람은 아주 적을뿐더러 접촉면 또한 넓고 깊지 않다. 그럴 때면 사실 우리는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모두가 인권 옹호자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발달장애인 동생 때문에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게 된 사람이라든지, 일용직 노동자인 아버지의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무 공부를 시작한 사람처럼, 더 보편적으로는 우리 아이가 사는 세상이 더 평화로웠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처럼, 사회의 큰 줄기를 바꿀만한 것이 아닐지라도 작은 단위에서 자신이 속하거나 경험한 사회의 불합리성을 바꿔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상대와 맞닿아 보았는지 묻고 싶어진다. 얼마나 대화를 섞고 숨결을 나누어 보았는지 듣고 싶어진다. 자신과의 연결점이라고는 같은 나라 땅 어딘가를 조금씩 점유하고 있다는 것 외에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의심의 눈총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 것일지, 허심탄회하게 나눠보고 싶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혐오의 그림자가 사실은 자기 스스로에게 드리워져 있는 것은 아닐지, 알고 싶다. 어느 작가의 표현을 빌려 우리는 서로 대립항이 아니라 공의존 관계라고, 북소리처럼 울리고 싶다. 그리고 평범한 당신은 그 어느 소수 그룹에도 속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 어느 경우에도 철저히 보통으로 규정되는 범위에 머무를 수 있을지, 당신이 약자가 되는 날이 오지 않을지, 그래서 어떤 소리 없는 자를 향한 횡포가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와 비판이 되는지 모른 채 살아갈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지금 필요한 것


애초에 배제당할 가능성이 희박한 ‘정상’의 삶을 영위하며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에 속한 사람이야말로 다름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교정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다시 스산해짐을 어쩌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난민과 이주민을 포용하는 정책을 논하려면 대중의 공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중의 인식이 담에 가로막힌 지는 오래고, 그렇다고 무작정 손 놓고 기다리자니 생사의 문제에서부터 더 나은 삶을 위한 다양한 이유로 비자발적/자발적 이주가 전 세계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한국은 경제 선진국이자 목적국으로 이주민 포용을 위한 논의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 자명하기에 아시아 최초 난민법 제정국이라는 면피를 더 오래 가져가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를 피하기 보다 여러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 대중을 설득하는 과정, 딱 반 발짝 앞선 움직임이 더욱 절실한 때이다.

공적 의지의 발굴만큼이나 중요한 개개인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자신도 누군가에게 철저히 타인임을 알고, 낯선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으로 끈질기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부터다.




No one leaves home

unless home is the mouth of a shark.

You only run for the border

when you see the whole city running as well,

your neighbors running faster than you,

with blood down their throats.

그 누구도 집을 떠나지 않아요,

집이 상어의 입이 되지 않는 한.

당신이 국경을 향해 내달리는 건,

온 도시가 국경을 향해 내달리고

당신의 이웃이 목구멍에 피를 삼키며

당신보다 더 빨리 내달리는 걸 볼 때뿐이죠.


– Warsan Shire, 「Hom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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