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주도개발, 수평적 관계 맺기의 기술
한국인 국제개발 종사자로 현지 주민을 만나는 데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완벽한 외지인으로 손짓 발짓 맨땅에 헤딩해서 현지 사람들과 직접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과 현장에 이미 상주해 있는 파트너와 협력하는 간접적인 방식이다. 각각의 목적과 장단점이 분명히 있지만 때론 구분 없이 섞이기도 하는데, 그동안 속해있던 조직의 특성상 주로 후자의 방식으로 일을 했다.
지역 조사나 사업 평가를 할 때면 현지 주민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기도 했지만, 평상시에는 주로 현지 파트너기관 직원과 말을 섞고 생각을 엮으며 일을 만들어갔다. 그런데 현지 주민과 현지 직원 사이에는 국적이 같다는 공통점보다 다른 역할과 사회계층에서 오는 차이점이 훨씬 컸다. 다른 밀도와 다른 결의 교제가 필요해서, 어떤 관계가 더 큰 노력을 요구하는지 비교하기란 쉽지 않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소통이 저절로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듯이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주파수에 맞추어 메시지를 발산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현장 대변자로서의 업계 사람들
한정된 자원과 조건을 가지고 현장의 다양한 의견을 재구성하는 중간다리로 일하면서 현지 직원과 껄끄러운 생채기를 지나 보내기도 했다. 상당 부분 인식의 차이를 좁히는 데 필요한 인내심과 포용력을 기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고 무지갯빛 기억으로 회상할 뿐이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무중구(외국인)를 무시하는 현지 직원들도 가끔 있었는데, 이 분야의 생태계를 빠삭하게 쥐고 있거나, 전문적인 분야가 있거나, 지역을 안다는 명목으로 외국인 개발 워커에게 한 수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보통 그 나라 또는 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세계 주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엘리트였고, 저개발국에서는 나름대로 보상이 좋은 전문직이기 때문에 자부심이 컸을 수 있다. 아니면 그동안 아는 체, 있는 체, 전지전능한 체, 현장을 무수히 휘저으며 다시금 지배하고 다닌 선진국 개발 종사자들로부터 자존심을 지키는 일말의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신뢰 쌓기 전 보이는 경계가 아닌 오래된 습관 같아 보인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를 견지했던 이들은 이내 가시적인 성과와 권력에 집착을 드러냈고, 가령 후원기관의 대표라든지 높은 위치에 선 사람을 볼수록 허리를 더욱 낮게 숙이는 그리 놀라울 것 없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목표 달성을 위해 어찌저찌 협업을 계속 이어 나가거나 어떤 식으로든 협력을 깨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공동의 목표와 합의점을 만들어가는 상황에서 상대가 나보다 광범위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어떤 목적으로 특정 근거를 활용하는지 검증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현지 직원들, 그중에서도 주로 수도의 본부 사무실에서 외국인을 상대하거나 의사결정을 내리는 직책자들은 때때로 현장의 대변자로 자신이 과거 경험으로 체득한 것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반복 재생하곤 했다. 같은 수준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투박하게나마 있는 그대로의 지금을 투영해 주는 지역 일꾼과 주민들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나아갈 바를 명료하게 해주곤 했다. 간혹 현지 직원의 생각과 현지 주민의 말이 배치될 때, 한쪽에 귀를 더 기울이는 것이 미세한 긴장을 유발하기도 했다. 마치 한 운전대를 여러 명이 잡고 레이스를 완주하듯 서로 타협점을 만들어간 기억이 여전히 먼지처럼 피어오른다.
‘현지 존중’의 진짜 의미
어느 날 신규 사업 개발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나에게 한 동료가 말했다.
‘지나친 현지 존중은 좋지 않다.’
마침 현지 직원들이 제안한 활동을 프로젝트에 넣으려고 마음먹었던 터라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이 나라, 이 지역, 이 이슈에 대해 제대로 고민도 해보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보고 싶은 성과만 도려내도록 강요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불쑥 솟구쳐올라왔다. 이런 내면의 동요가 내 불편한 표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을 것이다. 동료는 거기에 답이라도 하듯 ‘책상에서 펜대만 굴리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며 자신이 뱉은 말에 여지를 남겼다.
당시에 그 동료는 조직의 성과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말은 전략적 선택과 집중을 통해 조직의 개입을 통제하며, 합의된 성과지표를 적용하여 선별된 성과를 모으도록 직원들을 독려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 치 떨어져 돌이켜보니 그가 말한 ‘현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확언하는 현지 ‘직원’이지 현지 ‘주민’이 아니었으리라 얼마간의 신뢰를 담아 해석이 되었다. 분명 무조건적인 수용보다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할 때가 있고, 이해 관계없는 외부 시선으로 비로소 새롭게 제안하고 촉진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매일 같이 소통하는 현지 직원과 맺는 관계의 양상은 다양했다. 협력적이었다가, 긴장감이 돌았다가. 배웠다가, 배움을 주었다가. 한국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자신의 성정에 따라 현지 직원과 관계를 맺는 양상을 달리하는 게 눈에 띄었다. 한 동료는 현지 사전조사를 진행하고 난 뒤 본인이 현지 직원들의 체계적인 조사 역량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가슴 벅찬 소감을 나누었다. 그건 현지 직원들의 친절하고 정성 어린 피드백에 근거했는데, 그 일회성 사건은 동료가 이후에 계속 일을 해나가는 데 무제한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준 것 같다. 반면에 어떤 동료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본인의 행위가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의 모든 경우를 헤아리며 자기 의심을 거듭했다. 그런 것에 비해 현장의 목소리는 거의 조건 없이 신뢰하며 1순위로 새겨들었다. 자기 확신 정도에 따라 상대와 맺는 관계의 형태나 선별된 기억의 내용이 전혀 달라지니, 결국 관계의 모양은 일정 부분 이상 자신의 속성이 만들어가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펀딩기관의 전문가‘로 보는 사람과 ’협력기관의 조력가‘로 보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주는 역할이 다를 테니 말이다.
현지 존중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기술이나 꼭 이룩해야 할 정답의 모양새가 있기보다 살아있는 인격체로 서로 간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추구되는 것이 아닐지, 본연의 성질대로 최선의 하모니를 만들어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은 게 아닐지, 생각의 끝단을 접어본다.
환대가 진심이라기엔, 호의가 거짓이라기엔
한편 가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현지 직원들과 갈등 선상에 있지 않으면서도 이따금 편안하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 순간들이 있었다. 하대와 무시가 아닌 필요 이상의 환대나 호의를 받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때로 외국에 잠시 머무는 것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자의든 타의든 한 사회의 규범 안에 살다가 그 어떤 사회적 기대나 압력에서 벗어나 ‘내가 나’로 있는 자유 또는 ‘새로운 나’로서의 정체성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개발국 현장에 나와 있는 것이 좋은 이유는 풍요를 넘어 과잉의 땅에 만개했던 욕망의 거품과 불안의 안개를 거두고, 인간의 삶에 중요한 알맹이만 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해 주는 것, 한 마디로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되는 것 때문이지 않을까. 왜 수많은 이들이 루앙프라방 푸시산의 일몰을 보기 위해 하루의 반이 걸려서까지 원시의 자연에 이르고야 말까.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것을 찾기 위해 기어코 당도한 것이 아닐까. 삶이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자기 내면이든, 자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이든, 일말의 변이로의 추구 조금 비틀어 보면 현지에서 외국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혜나 존중 때문에 현장에 이끌리는 거라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까 싶었다. 돕는 자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된 동기가 없더라도 어떤 자원(대부분은 돈)을 대가 없이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이미 기울어진 관계일 테니 말이다. 내가 누군가를 대신해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돌려받게 되는 감사를 적당히 기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일을 하며 그 정도 보람도 누리지 못해서는 남는 게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모든 감사 인사를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물론 현장에서 그간의 수고를 함께 축하하고 즐기는 자리는 항상 기뻤다. 누군가를 초대하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손길에는 언제나 선한 마음과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변하지 않는 기분 좋은 사실 때문이다.
그래도 간혹 지나친 환대와 절대적인 수용을 경험할 땐 약간의 씁쓸한 감정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부조화는 사실 달콤한 표면에 가려진 본심을 가늠하기 어려운 데 있었다. 진심이라기엔 불투명하고 거짓이라기엔 순수한. 내게는 진위를 판단할 이유와 경계를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내가 인지했던 감정은 내가 가져다줄지 모르는 어떤 이익 때문에 나를 예우할 수밖에 없는, 그런 피상적이고 비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가식과 허무의 부산물이었을 것이다.
의식적인 소통 이어가기
결국 멀리 떨어져서 내리는 판단을 거두고 좋은 소통을 이어가는 게 공적인 영역을 넘어 인격적이고 다면적인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방법이었다.
현지 직원들과 함께 조직 리더십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당시 컨설턴트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에 대해 화두를 던지며 직접 겪은 예시를 나누었다.
그는 한 마을에 방문했을 때 ‘발전기 있어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마을주민이 ‘네, 있어요’라고 답해, 다행으로 생각하고 그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고 한다. 점차 날이 저물어 가는데 발전기는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곳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식당에서의 일화도 있었다. 일반 볶음밥을 시켰는데 소고기가 잔뜩 버무려져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일반 볶음밥을 시켰다고 난색을 보였더니 종업원은 ‘소고기 볶음밥 아니라고 안 했잖아요’라며 받아쳤다고 한다.
같은 언어의 결합 속에서 초점이 달랐을 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나누지 않았을 뿐, 누가 완전히 맞고 틀린 소통은 아니었다. 오해와 불편을 줄이기 위한 소통의 첫 단계는 하나를 열 개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열 개를 하나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모두가 나와 같은 식으로 발화하기를 원한다면, 누군가 나와 같은 식으로 언어를 구사하지 않아 신경이 거슬린다면, 아마 대화에서의 독재자 또는 독백가가 되기를 자처하는 꼴이지 않을까.
이 세계에서는 언어도 한몫한다. 그쪽의 모국어도 이쪽의 모국어도 아닌 가장 영향력 있는 제3국의 언어(주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알게 모르게 강요받고 있으니, 불통의 소지는 더 다분하게 일어날 수 있다. 서로에게 더 부지런한 설명과 부가적인 해설을 베풀 때야 진심이 어디선가 만나리라 기대할 수 있다.
누가 현지주도개발을 원할까
현지화(Localization)와 현지주도개발/지역주도발전(Locally-led Development)은 여전히 국제개발 분야 변두리에서 울리는 단어(buzzword) 같다.
현지에 자금(funding)과 권한(power)을 위임하는 게 핵심인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과연 어느 국제개발 기관이 ‘아낌없이 주고‘ 싶어 하는지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현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거대 국제개발 기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일들이란, 협력적 관계는 커녕 전략이라는 미명 아래 가차 없이 일자리를 빼앗고 마는 착취적 관계를 훨씬 더 닮아있다.
현지에서 나고 자라 일해온 내 친구 라니도 기관의 중점 지역이 바뀌면서 일주일 전에야 퇴사 통보를 받았다. 공무원 조직의 잦은 보직 변경뿐만 아니라 현장 직원의 비자발적 퇴사로 인한 턴오버는 개발협력 사업의 가장 큰 도전 과제로 거론된다. 현지 직원들은 단순히 담론을 공식대로 실행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기존 담론을 새롭게 재해석, 재창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다. 또한 변화는 현장을 알고, 현장을 사랑하고, 현장을 변화시킬 의지가 있는 현장 활동가들에 의해 가능하다. 그런데 역량 있고 열정 있는 사람들이 떠돌아다니게 되니 이를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유엔을 비롯해 대형 개발 기관의 정책이 거대한 물줄기라면, 개인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나의 정체성과 위치성을 성찰하고 수평적인 만남을 맺어가는 실천이야 말로 각지에 스며드는 작은 물줄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