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사람들, 그들이 일하는 이유
현장 직원들에게 나는 같은 프로젝트에 배정된 동료이자 외부에서 온 감독자인 동시에, 잡담을 나누는 친구였다. 그야말로 다층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홉 달을 함께 일하고 밥 먹고 여행하는 동안 쌓인 말들의 실오라기를 엮어 ‘그들이 일하는 동기’라는 타래로 묶어둔다. 정교하게 설계된 민족지라기보다 나중에 이어 붙인 주관적인 해석에 가깝다는 무책임한 고백을 해둔다.
현장 직원들은 갓 파견된 젊은 외국인 여성이 품을만한 호기심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를 마치 나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상세하세 말해주곤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서로를 판단하게 될 거라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현장 직원들은 자신들이 내 앞에서 한 이야기가 몇 년 후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 한국어로 적혀 생면부지의 존재들에게 공유될 거라 기대했을 리 없다.
일에 대한 동기는 일반화된 이론이나 직접적인 인터뷰를 통해서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나와있는 자료들은 특정 맥락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인터뷰는 때로 이치에 맞는 그럴듯한 답변만 허용한다는 점에서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때때로 외부 감독자의 모자를 써야 했던 나의 입장이 미묘한 위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괜찮은 직장 또는 월급 수준
니티는 내가 담당한 프로젝트에 고용된 직원이었다. 차로 4시간 북쪽에 있는 본가를 두고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 나와 비슷한 시기에 프로젝트 지역에 상주하게 됐다. 퇴근길 그녀의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주홍빛 일몰로 물든 강변을 조망하는 건 현장에서 누리는 최대복지 중 하나였다. 니티와 나는 크메르 새해 휴가 기간을 맞아 그녀의 고향인 몬둘끼리로 향했다.
9인승 승합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자기가 아는 현지 맛집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한적한 식당에 자리를 잡자마자 사무실에서는 꺼내지 않을 법한 대화 주제를 식탁에 올렸다.
"프로젝트 예산 수정 하면서 나랑 봉 소페악 급여 차이가 크게 나는 걸 봤어."
그녀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는 듯 진지한 얼굴에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나랑 소페악은 경력도 비슷하고 초과 근무나 현장에 가는 빈도도 비슷하니까 급여 수준이 비슷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순간 내 정체성의 무게 추가 친구와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사이에서 요동쳤다. 그녀는 고향에 도착해서야 나와 속마음을 나눌 정도로 안전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혹은 내가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고 생각해 비밀스레 털어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상 그럴 권한이 없었던 나는 현지 운영 책임자와 상의할 것을 권했다. 그녀는 이후에 인사부와 따로 면담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그만두었다.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았다. 이후에도 페이스북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특별히 할 말이 없어도 때가 되면 어떻게 지내는지 ‘하우 알 유(how are you)’ 같은 단순한 안부를 거듭 묻고 지냈다. 무조건적인 헌신과 박봉을 당연히 여기는 한국과 달리, 캄보디아에서 국제 NGO에 근무하는 건 공무원이나 웬만한 기업체에 비해 좋은 직업으로 여겨졌다. 급여도 충분히 받고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정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여 수준이 불만족스럽다면, 바로 그만두거나 다른 직장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이상을 좇아가거나 과거를 돌보거나
라니도 타 지역에서 온 이주 노동자이자 나의 뚜벅이 퇴근길을 책임져주는 동료로 가깝게 되었다. 라니는 고향에서 청소년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시작하며 기관에 애정을 쌓았다. 일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대학 학비까지 보태준 멘토 직원도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것이다. 고향에서 3시간 떨어져 있는 지역에 계약직 자리가 나자 약간의 고민 끝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자기와 같은 가난한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돕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했다. 라니는 과거의 자신을 돕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퇴직 통보는 너무나도 급작스러웠을 테다. 내가 현장 사무소에 합류한 지 3개월 만에 송별회가 열렸다. 본사의 ‘전략적 결정’에 따라 프로그램이 단계적으로 폐지되었고, 이는 관계 직원들의 해고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송별회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과 목소리로 사무소 마당이 채워지는 동안 왠지 모를 고요함이 공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윽고 라니는 쑥스럽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짧은 소회를 나누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의 마을에 NGO 직원들이 종종 찾아왔는데, 기관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유창하게 생활 지식을 가르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고 했다. 그 모습을 좇아 시작한 청소년 자원봉사자 활동이 결국 지금까지 이끌었다고 했다.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다른 선택을 한 것은 더 나은 자신에 대한 존경이었을 것이다. 혹은 과거로부터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일지라도. 잔혹한 킬링필드의 여파 속에서 난민 캠프나 고아원에서 자란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과거가 어떻게 현재로 이끌었는지 애써 숨기지 않았다.
지역의 발전? 개인의 발전!
소클리엥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0년 넘게 다닌 국제 NGO에서 장학금을 받고 프놈펜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지만, 다시 지역에 돌아와 농촌 지역 개발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와 그의 처가 가족들이 살아온 터전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소클리엥과 같이 현장 모니터링을 떠났다. 메콩강 위에 작은 섬으로 들어가려면 나룻배를 타야했다. 배에서 내려오는 교복 입은 소녀들이 보였다. 그는 마치 소녀들이 들어도 상관 없다는 듯 조금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외딴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교육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설명했다. 그의 진지한 눈을 보며 나는 얄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치만 모두가 공부하고 도시에 있는 대학에 가면 여기에 모든 논밭은 누가 돌보나요? 섬에는 누가 살고요?"
그는 이상한 질문이라는 듯 구겨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게 ‘개발‘과 ’발전‘이 의심 없이 추구되어야 할 가치라면 더 이상 추궁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질문은 대학 진학률이 높고, 도시 인구가 지나치게 많으며, 자살률이 치솟아 있는 고향나라가 ’개발‘된 결과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길 바랐다. 그리고 큰 아들을 호주에 유학 보내겠다는 꿈도 가지고 있었다. 역량 강화 교육 차 호주 지부에 갈 기회를 얻으면서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 시스템을 엿본 모양이었다. 지역에서 일하지만 국제 NGO를 통해 일한다는 건 그에게 좋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공동체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동기를 모두 충족시키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 자부심과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초기 해석과 새로운 질문, 그리고 시사점
돈, 사회적 존경, 자신과 타인의 발전은 어떤 직업에서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직업 동기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지인들 이야기 속에는 내적 동기를 넘어서는 외적 패턴이 있었다. 기부 단체의 정책 결정과 운영 방식, 그리고 서구식 개발 모델이 현지 직원들의 채용과 근속 유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점이다. 현장 직원들은 급진적인 사회 변화와는 거리를 두면서 또 다른 엘리트 계층 또는 지역 권력으로 자리 잡는 면모를 보였다.
NGO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사회 변화를 위해 일하고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나의 가정은 크게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대신, 일상생활 속 그들의 저항은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방식이라기보다 간접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구원한다거나, 때때로 은밀히 국가에 대한 비판을 털어놓는 방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