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통과해 간 수많은 무언가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
현기증
가만한 나날
드림팀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얕은 잠
감정 연습
말과 키스
누구나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 하나쯤은 있다. 그는 사회생활을 하며 겪는 경험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이별일 수도 있다. 타인과의 유대감, 혹은 단절일 수도. 그것이 무엇이든 그 긴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나라는 사람은 전과 달라진다.
현실에서는 나의 경험도, 나의 변화도 벅차기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다. 애초에, 자신이 겪은 사건과 그를 통해 느낀 복잡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터놓고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들을 수도 없고. 하지만 궁금할 때가 있다. 이 힘든 상황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넘어갔을까. 나만 이렇게 괴로운 걸까.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걸까.
<가만한 나날>에 수록된 소설을 통해 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내가 살아왔던 서울과는 전혀 다른 서울을 마주하며 세상의 어긋남을 마주한 시진(<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 엄마의 두려움에 묶여 나아가기를 걱정하던 원희가 마침내 발을 디딘 세계(<현기증>). 두 소설의 끝에서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둘이 앞으로 걸어갈 순간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가만한 나날>, <드림팀>, <감정 연습> 에는 직장에서 맺어진 관계로 인해, 직장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변화한 이들이 등장한다. <가만한 나날> 속에는 나의 행동이 예기치 못하게 타인을 다치게 했을 때 겪어야 했던 괴로움과 외로움이, <드림팀>에서는 여전히 나의 말과 행동을 옭아매는 전 직장 상사와의 시간이, 그래서 응원하기 힘들지만 미워하고 싶지도 않은 복잡한 감정이, <감정 연습>에는 첫 직장 생활에서 경험하는 경쟁자를 향한 미움과 그를 돌이켜보며 느끼는 수치심, 익숙한 동네에 대한 그리움 등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타인의 경험을 들여다보는 것은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된다. 그들을 응원하고 싶어지고 그들과 비슷한 감정을 겪는 나의 하루도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나를 통과하며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수많은 일들, 존재들, 그리고 책들을 가만히 곱씹어보게 된다.
“엄마, 나 여행 온 거야. 내가 밖을 안 돌아다니려면 유럽까지 왜 왔겠어?”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눈물이 나려 했다. 그녀는 사실 여행을 즐기지도 않았고, 꼭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악착같이 돌아다녔다. 원한다면 어디든 가 볼 수 있으며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불길한 예감이나 꿈 따위는 힘이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결국 그녀 안에도 그런 두려움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녀는 끝내 여행을 즐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 <현기증>
그때 나는 그가, 적어도, 대화를 더 이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내 기분을 알은척해 주길 바랐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과 얘기해 보고 싶었고,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삶의 경험이 많은 이로부터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의 말을 듣길 기대했다. 아마도 우호적이지만 균형 잡힌, 그런 말을. - <가만한 나날>
풍경은 너무나 조용하고 또 아름다웠기 때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풍경은 자신의 다급함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막, 얇은 피부 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밖에는 한없이 무심한 입자들이 떠돌고 있었다. - < 얕은 잠>
여기가 끝인가? 이게 시작인데, 왜 끝인 것만 같지? 어둠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 <감정 연습>
나는 현진을 딱 한 번 만났고, 그 뒤로 마음속에서 그녀를 왜곡하고 자의로 해석하고 있었다. 내 모든 왜곡과 해석과 신비화에 관련 없이, 그녀는 자신의 모습대로 존재했다. - <말과 키스>
돌이켜보면 문학은 늘 내게 감당해야만 하는 것을 감당하겠다는 용기를 주었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변화와 혼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