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한 남자’가 ‘섹시한 여자’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남자의 몸’은 드라마 시청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됐다. ‘잘생긴 얼굴’에서 ‘잘생긴 몸’의 시대로 접어든 이후 남배우들의 잘 만들어진 근육은 연기력만큼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연기력보다 더 중요한 필요충분 요건이 되고, 여배우와 ‘이상적 차이’가 나는 큰 신장은 천부적 자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배우들이라면 이성에게는 설렘을 자극하고, 동성에게는 선망이 될 수 있는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연기력에 선행하기도 한다. ‘임성한의 남자’로 불리는 이태곤과 성훈은 TV조선 ‘결혼작사 이혼작곡’에서 소위 ‘관전 포인트’ ‘킬포(킬링 포인트, killing point)’로 기능하는 드라마 속 ‘남주의 외적 조건’에 충실한 선이 굵은 얼굴과 근육질 몸의 남성적 매력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결혼작사 이혼작곡’에서 이태곤은 수영장, 성훈은 욕실을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 탓인지 수영장 장면에서 이태곤의 벗은 몸은 크게 시선을 끌지 않았다. 이는 시청자들이 더는 남자의 벗은 몸에 큰 감흥을 보이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8회가 방영된 14일, 욕실에서 나온 이태곤이 벗은 몸으로 등장하자 안쓰러운 의견의 실시간 댓글이 쏟아졌다.
본 방송이 방영 중인 가운데 드라마 실시간 게시판은 이태곤의 몸에 관한 평이 다수를 이뤘으며, ‘실망’ ‘부담’ 등의 키워드로 채워졌다. 이 중 “이태곤 벗지 마요. 수요 없는 공급”이라는 댓글은 최근 남배우들의 몸이 드라마에서 경제적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서 기능해왔음을 상기하게 했다. 그러나 이태곤의 상의 노출에 따라붙은 실망감은 시청률 등락보다는 극 중 가장 복잡한 애정 관계를 예고한 완벽한 남자 신유신의 매력을 반감하는 ‘웃픈’ 상황을 연출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집안 외모 능력 모두 상위 10% 기준을 충족하는 남자이자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성품까지 세상 가장 완벽한 남편, 아내 사피영(박주미)은 남편 신유신(이태곤)에 관해 이렇게 생각하고 믿고 확신한다. 그런데 그의 설렘과 선망의 기준치를 벗어난 몸은 극 중 신유신의 완벽한 남자 설정에 살짝 흠을 남겼다.
남배우의 벗은 몸에 더는 열광하지 않지만,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기준치를 벗어난 남배우의 벗은 몸은 불필요한 설정 혹은 장치로 전락하기 일쑤다. 완벽하게 관리된 근육으로 중무장한 남배우조차도 극의 흐름을 끊고 벗은 몸을 드러내면 같은 상황에 부닥치긴 마찬가지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드가 모랭은 그의 저서 ‘스타’에서 연극을 밀어내고 대중문화의 중심이 된 영화 시대를 조망하면서 “영화에서는 아름다움이 배우다”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라 “배우는 심지어 사물의 상태로 취급될 수 있다”라며 작품의 구성 요소로서 배우와 사물에 관해 언급했다. 또한 모랭은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레슬리 하워드의 “배우는 없어도 무방하며, 또 그들은 아무것으로도 대체할 수 있다”, 프랑스 영화배우 장 슈브리에의 “우리 인기배우들은 가구이다. 제법 가치 있고 틀림없는 가구이지만 감독이 배치하는 가구이다”라는 말을 인용해 작품에서 배우는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사물처럼 배치될 수 있음을 설명했다.
이를 근거로 해석하자면 이태곤의 상의 탈의 장면은 첫째, 배우의 기본 요건인 아름다움을 충족하지 못해 실망감을 안겼고, 둘째, 극본과 연출에 의해 부적절하게 배치된 사물로 전락해 몰입도를 방해했다.
극 중에서 남자의 벗은 몸은 PPL 배치만큼이나 제작진의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 됐다. 이병헌 감독은 자신이 극본까지 담당한 ‘멜로가 체질’(JTBC, 2019)에서 극 중 손범수 PD(안재홍)가 드라마 제작사 마케팅 담당 추재훈(공명)과 블랙 코미디 식 언쟁을 벌이는 상황 설정으로 제품 홍보는 물론 드라마 제작 문제점을 공론화하기까지 했다.
지난 4일 종영한 ‘런 온’(JTBC)은 극 중 육상선수인 기선겸(임시완)이 운동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벗은 몸을 노출하게 했다. 남성적 매력보다는 육성선수의 몸에 초점이 맞춰진 임시완의 상의 탈의는 기선겸의 올곧은 성격을 부각하는 동료들과의 대화 가운데 부수적 장치로 녹아들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tvN, 2019년)는 ‘불편한 미러링’이라는 논란이 제기도 했지만, 여성 중심 멜로에 걸맞은 설정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배치해 공감을 끌어냈다. 연상연하 두 커플 중 배타미(임수정)가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10세 연하 연인 박모건(장기용)의 몸을 은밀히 관찰하는 시선이 그려진 장면은 특히 인상적으로 연출됐다. 카메라는 오픈칼라 셔츠의 목선과 여밈 부위 사이를 클로즈업하고, 등에 밀착된 셔츠로 인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몸 선을 따라갔다. 이처럼 남배우를 노골적으로 성 상품화해 그간 여성에게만 쏠린 섹슈얼리티 편향을 역으로 이용했다.
남배우의 벗은 몸이 PPL처럼 필요악인 듯 취급되는 이유는 최근 멜로, 로맨스의 쇠락과 맥을 같이한다. 이뿐 아니라 한동안 쏟아진 큰 키와 잘 만들어진 근육을 갖춘 모델 출신 배우들의 전성기가 수그러들고 있는 상황과도 연결된다.
‘비밀의 숲’(tvN, 2017, 2020년)에 이어 ‘시지프스 : the myth’(JTBC)까지 스릴러물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조승우, ‘스토브리그’(SBS, 2019, 20년), ‘낮과 밤’(tvN) 등 출연작마다 화제를 남기는 남궁민은 고대 그리스 남신을 연상하게 하는 외모와 체격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연기력만으로 몰입도를 높이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런 온’ 임시완은 멜로, 로맨스에 맞지 않는 키와 체격임에도 상대 여배우 신세경과 ‘겸미(기선겸, 오미주) 커플’로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의 순간 시청률을 올리는 기폭제로 기능하는 남자의 벗은 몸에 대한 열광은 성적 대상으로서 여배우를 과도하게 성 상품화한 편향적 섹슈얼리티 과잉의 반사작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화 심리학자 가시다 슈는 그의 저서 ‘성은 환상이다’(2000년)에서 “여성은 도구화되고 상품화된다. 바꿔 말하자면 여자의 몸과 성기가 남자에게 대상화, 도구화, 상품화, 페티쉬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 도구, 상품으로서 역할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라며 여성이 스스로 성 상품화에 간여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공작의 꼬리, 사슴의 뿔, 사자의 갈기처럼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화려한 외양으로 암컷을 유혹하는 것과 반대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를 대하는 대중의 시선이 바뀌고 있다. 최근 미디어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도구화하고 상품화하지만, 시청자들은 노골적으로 성 상품화된 배우보다는 스토리 속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표현력을 가진 배우에게 깊은 공감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이태곤의 다소 실망스러운 벗은 몸은 마른 모델만 등장하는 런웨이에 다양한 체격의 모델이 등장해야 한다는 견해와 맥락을 같이해 보통 남자와 보통 부부 일상의 리얼리티를 높인 묘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극 중 인물 중 가장 복잡한 애정 관계의 중심에 서게 된 완벽한 남자 신유신에 관한 ‘환상’ ‘판타지’를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댓글의 반응을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어 보인다.
설득력 없는 성 상품화는 남배우와 여배우는 물론 작품의 격까지 떨어뜨린다. 이유 없이 배우들을 ‘웃픈’ 상황의 희생양으로 만들기보다 극의 흐름에 더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타이틀 사진=SBS ‘야왕’ 영상 캡처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