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로서 ‘여성’, 대명사로서 ‘그녀’는 남성과 다른 생물학적 차이를 의미하지만, 사회적 차별로 인식돼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여성이 성차별에 반기를 들면서 ‘여성’은 남성의 권력과 권위를 위협하는 혁명적 뉘앙스를 함의하게 됐다. 차별에 대한 대항은 ‘차이’의 인정이 아닌 ‘동등’이라는 절대 권리 추구로 이어졌다.
유행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적 지위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패션은 더없이 강력한 저항의 코드이기도 하다. 탈코르셋에 공감하지 않는 여성들조차도 공적 자리에서 기죽지 않고 권위를 내보이고자 할 때 남성적 드레스코드의 전형인 블랙 팬츠 슈트와 화이트 셔츠의 조합을 선택한다.
블랙 팬츠 슈트와 화이트 셔츠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남성성이 퇴색되고 ‘단호함’이라는 상징성만 남았다. 이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가 허물어진 가운데서도 화이트 셔츠와 넥타이의 조합은 부정할 수 없는 남성적 드레스코드로 여성들이 ‘강인한’ 이미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 히든카드처럼 사용된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디올 퍼퓸은 ‘디올 친업(DIOR CHIN-UP)’ ‘디올 스탠즈 위드 위민(DIOR STANDS WITH WOMEN)’ 캠페인 일환으로 김연아를 비롯해 각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는 전 세계 여성들의 초상 및 영상 인터뷰 시리즈를 공개했다. 김연아를 비롯해 배우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 야라 샤히디(Yara Shahidi), 리빙빙(Li Bing Bing), 소설가 레일라 슬리마니(Leila Slimani),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인디아 마다비(INDIA MAHDAVI), 모델 딜론(DILONE) 등이 ‘독립적이고 당당하게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용기, 열정,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에 빛을 밝혀온 비범한 현대 여성들’로 선택됐다.
이 캠페인에서 여성들은 화이트 셔츠 혹은 셔츠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아이템을 선택해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 이미지를 표현했다. 특히 김연아는 가르마 포마드 헤어를 하고, 날렵한 블랙 재킷에 화이트 셔츠와 블랙 내로우(narrow) 타이를 더해 ‘당당한 여성’ 클리셰를 충족했다.
김연아가 선택한 화이트 셔츠의 빳빳한 깃과 이 깃을 더욱 날카롭게 보이게 하는 블랙 넥타이는 능동적 인간상의 상징이다.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독립적이고 당당한 김연아가 굳이 화이트 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기존 관념의 지루한 반복을 거부하지만, 디자이너인 지인은 “메시지가 명확하잖아”라며 전형적인 남성의 상징성을 스타일로 취한 김연아 화보가 전달하는 군더더기 없는 의미를 언급했다.
화이트 셔츠, 엄밀하게 빳빳한 깃과 커프스의 드레스 셔츠는 남성성의 전형이다. 화이트 셔츠로 대변되고 남성성으로 인식된 셔츠는 역사적으로 남성 속옷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셔츠는 태생부터 생물학적 남성과 공동 운명체로 출발했다. 여기에 더해 일상의 불편을 초래할 정도로 과장된 러프 장식이 사라진 19세기에는 목을 찌를 정도로 빳빳하고 높은 깃이 등장했다. 이 깃은 타이와 함께 착용돼 생명마저 위협할 정도였지만 남성들은 이를 고수했다.
당시 빳빳하고 높은 탈착식 칼라는 매일 갈아입어야 하는 셔츠의 불편함을 개선한 대신 남성들은 생사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경동맥으로 가는 혈액 공급을 차단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칼라는 ‘부친 살해자(Vatermörder)’라고 불릴 정도로 갑작스러운 남성 사망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여성의 코르셋에 빗대 죽음을 부르는 ‘남성 코르셋’으로 불리고 있다.
다소 잔혹한 역사적 기록은 오히려 빳빳한 깃의 화이트 셔츠와 타이의 조합이 갖는 상징성을 더욱 명료하게 한다. 강력한 남성중심주의 시대였던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여성 중 일부는 이처럼 위협적인 남성적 드레스코드인 셔츠와 타이의 조합을 취해 체제에 반기들었다. 수동적 삶을 강요한 시대에 능동적 삶을 산 여성들이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의지를 드러내는데 남성적 드레스코드는 가장 적합한 표현 방식이었다.
이름 앞에 동성애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래드클리프 홀과 앤 리스터는 남성의 권력과 권위가 절대적인 시기에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사회활동을 하며 자신의 역량을 펼쳤던 인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초상화 혹은 자료 사진 속에서 작가 래드클리프 홀과 기업가 앤 리스터는 남성성의 상징인 화이트 셔츠에 타이를 갖춘 차림을 고수하고 있다.
펭귄클래식 ‘고독의 우물’ 작가 소개란의 래드클리프 홀의 옆모습은 단호하면서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지적인 인상이다. 그는 빳빳하게 세운 깃의 화이트 셔츠에 폭이 넓은 블랙 타이와 블랙 재킷을 입고 블랙 페도라를 쓰고 있다. 작가의 자전적 삶이 반영된 이 소설은 1928년 당시 여성을 작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발표됐다. 책에 담긴 그의 모습은 남들과 다른 성적 지향성을 가진 여성으로서, ‘작가’라는 삶을 능동적으로 지켜내고자 했던 의지를 짐작게 한다.
그보다 한 세기 앞선 시대를 산 앤 리스터는 일기에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기록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해낸 모더니즘 시대를 살았던 래드클리프 홀과 달리 앤 리스터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이 극심했던 19세기, 지주이자 부동산 관리업을 하는 기업가로 능동적인 삶을 살았다. 앤 리스터는 래드클리프 홀처럼 남성복을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남성 군복에서 유래한 펠리스(pelisse), 스펜서(spencer) 같은 아우터, 승마 복장 등 블랙 의상에 화이트 셔츠를 받쳐 입는 일관된 스타일을 고수했다.
강력한 남성 우월주의 시대에 남성을 위협했던 앤 리스터가 남긴 일기는 영화 ‘앤 리스터의 비밀일기(The Secret Diaries Of Miss Anne Lister, 2010)’, HBO 드라마 ‘잰틀맨 잭(Gentleman Jack, 2019년)’으로 제작돼 페미니즘이 팽배한 현재에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그는 남성적 외모에 따른 고민과 패션에 관한 생각을 일기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앤 리스터에 관해 다룬 한 사이트는 그의 일기 중 패션에 관한 내용을 발췌해 서술했다. 그는 남자 같은 자신의 외모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면서도 1817년 9월 2일, “언제나 검은 옷을 입겠다는 계획에 들어갔다”라며 자신의 결심을 일기에 기록했다. 당시 여성들이 블랙을 장례식과 같은 제한적인 상황에서 입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주변의 시선을 능동적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의지가 엿보인다.
특히 그가 자주 착용한 것으로 알려진 승마용 해빗 셔츠는 당시 남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착용한 하이 스탠딩 칼라와 러플이 달린 남성 셔츠를 기반으로 하는 남성 드레스코드라는 점에서 그의 일관된 패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남성 코르셋으로서 부친 살해자로 불린 악명 높은 빳빳하고 높은 깃이 변형된 드레스 셔츠와 목을 꽉 조이는 넥타이는 21세기 남성들에게 신사의 격이라는 위상을 심어주는 필요충분 아이템이다. 잔인하게 허리를 조였던 코르셋이 사라진 시대에 코르셋의 또 다른 상징인 브래지어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반면 위협적인 ‘남성 코르셋’으로서 셔츠와 타이는 여전히 ‘당당한’ 이미지로 남성은 물론 여성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 사진=김연아 인스타그램, 디올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HBO ‘젠틀맨 잭’, 팽귄클래식 ‘고독의 우물’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