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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Mar 23. 2021

윤여정과 ‘리틀 블랙 드레스’, 진보적 상관관계

샤넬 ‘리틀 블랙 드레스’(류미연 일러스트), 윤여정/ 사진=김윤성 류미연 공저 ‘명품 판타지’, 영화 ‘여배우들’


배우 윤여정이 봉준호 감독에 이어 아카데미 역대 수상자로 기록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봉준호, 윤여정은 ‘거장’ ‘명감독’ ‘명배우’라는 권위적 수식어보다 ‘스마트하다’는 표현에 최적화된 영화인이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지적인 소통’이 가능한 이들은 언어뿐 아니라 문화의 장벽까지 넘어서는 유머와 여유가 ‘글로벌 역량’의 필요충분 요건임을 실감하게 한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미나리’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감동적인 경험을 진지하게 쏟아내는 감독 정이삭, 배우 스티브 연과는 달리 특유의 솔직담백한 유머로 웃음과 감탄을 유발했다. 그는 여유로운 유머만큼이나 삶에서 배어난 듯 자연스럽게 진보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대중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 지명, 나영석 예능에서의 영어 구사력에 감탄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배우로서 그의 정체성은 필모그래피 첫 페이지에 올라있는 영화 ‘화녀’부터 시작된다. 윤여정이 타이틀롤을 맡은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년), ‘충녀’(1972년) 연작은 무기력한 남성을 사이에 둔 경제력을 가진 여성과 사랑을 쥔 여성, 두 인물 간의 갈등을 그린다. 남성이 여성의 성취 대상으로 전환된 이 영화는 한국 여성중심주의 영화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이후 배우 윤여정의 범상치 않는 행보를 수긍케 한다.       


윤여정은 한국에서 중년 배우에게 붙는 존경과 찬사로서 ‘어머니상’ ‘아버지상’과는 거리가 멀다. 동료 중년 배우들처럼 주말 드라마에서 어머니 역할을 하지만, 모성으로 대변되지는 않는다. 영화 ‘하녀’ ‘돈의 맛’의 돈과 성을 탐하는 캐릭터, ‘여배우들’ ‘뒷담화’의 속내를 감추지 않는 시니컬한 배우 등 작품마다 다른 역할로, 다중적인 매력을 드러낸다.        


  

영화 ‘하녀’


윤여정 필모그래피의 시작인 영화 ‘화녀’, ‘충녀’부터 2021년 ‘미나리’까지 50년은 한국 영화의 모더니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습화된 ‘모성 판타지’를 충족하는 ‘어머니 윤여정’이 아닌 ‘배우 윤여정’으로서 그의 정체성은 패션사에서 ‘패션 모더니즘’으로 상징되는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 LBD)’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패션 모더니즘이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한 것처럼 ‘화녀’ ‘충녀’ 속 명자는 남성의 성적 대상이 아닌 성적 주체라는 점에서 모더니즘은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 이는 윤여정과 샤넬 리틀 블랙 드레스가 동일한 진보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1926년 샤넬은 산업혁명 이후 남성들의 색으로 군림하며 여성복에서는 상복용으로만 사용된 블랙을 특유의 짧고 편안한 실루엣에 적용한 블랙 드레스를 발표했다. 당시 보그 편집장은 “이 옷은 패션의 포드 자동차이며, 이 옷은 패션의 표준의상이 될 것이다”라며 극찬했다. 이후 현재까지 리틀 블랙 드레스는 진보와 혁신으로서 모더니즘의 상징이 됐다.       


리틀 블랙 드레스는 컬러와 실루엣, 두 요소로 해체해야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다. 블랙은 앞서 설명대로 1926년 리틀 블랙 드레스가 발표될 당시만 해도 남성 전용으로 특정한 성을 상징했다. 이후 권력과 권위를 대표하는 색으로 변함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샤넬 이후 성별의 경계가 사라졌다.     


김윤성 류미연은 공저 ‘명품 판타지’에서 샤넬 리틀 블랙 드레스의 블랙에 대해 “샤넬은 인류가 옷을 입은 이후 처음으로 검은색을 일상복의 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패션에서 검은색은 모든 색을 압도하는 색 중의 색이다”라며 ‘검은색의 패션혁명’을 일으켰다고 기술했다.      


실루엣으로서 리틀 블랙 드레스는 성별 경계를 해체한 블랙만큼이나 파격이었다. 샤넬 리틀 블랙 드레스는 팬츠와 함께 짧은 길이로 여성들을 일상의 불편함에서 해방하고, 옷이 주장하는 선이 아닌 사람의 선을 우선했다는 점에서 패션 모더니즘을 연 디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 ‘충녀’


작가주의 감독 김기영 작품에서 윤여정은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했던 시기인 1970년대, 성을 생존도구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대변자로 등장했다.      


‘화녀’ ‘충녀’ 속 깡마른 몸과 길게 늘어뜨린 자연스러운 긴 머리, 아이 같은 미숙한 몸짓의 윤여정은 같은 시기 활동한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이는 학대를 학대로 여기지 못하고, 학대를 오히려 제압의 도구로 역이용하며 상대에게 집착하는 상황의 섬뜩함을 배가하는 효과를 낸다.         


특히, 블랙 미니 원피스는 ‘화녀’ ‘충녀’ 연작 주인공 명자의 욕망과 새 출발을 상징하는 드레스코드로 기능한다. ‘화녀’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뒤로하고 상경한 후 서울에서 식모가 된 명자가 입은 민소매 블랙 미니 원피스는 폭발 직전의 억눌린 욕망이 읽히는 효과를 낸다. ‘충녀’에서 처녀성을 잃게 한 유부남의 집을 쳐들어가 부인과 담판 짓는 명자의 비숍 슬리브의 블랙 미니 원피스과 블랙 투명 스타킹은 적나라하게 드러낸 욕망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한다.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미디어시티서울 2014’ 프리비엔날레에서 상영됐던 ‘충녀’는 배우 윤여정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빨간 브래지어와 쇼츠를 입고 핑크색 이불을 둘둘 감싸면서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장면은 관능적이기 보다 비디오 아트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극 중 명자의 패션은 작품과 분리되면 철저하게 현재성을 띠고 있다.        


   

웹예능 ‘문명특급’


윤여정이 출연한 영화의 의상 작업을 했던 의상감독들은 윤여정의 매력으로 오픈마인드, 즉 개방성을 언급하면서 “대화가 즐겁다” “막힌 구석이 하나도 없다” “나이 차, 세대 차가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꽉 막히지 않은 개방성은 예민해 보이는 외양과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이 때문인지 여유로운 75세 배우 윤여정에게서 25세의 청년 배우 윤여정이 보인다.        


윤여정은 웹예능 ‘문명특급’에 출연해 지위가 보장되는 한국 촬영 현장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괴물’ ‘매너리즘’을 키워드로 서술했다. 그는 “그런 환경에 있으면 나는 괴물이 될 수 있어요, 그런 게 매너리즘이지 뭐야”라며 “내가 환경을 바꿔서 털사 오클라호마 같은 데 가서 미국 애들한테 ‘WHAT’ 그런 소리 듣고, 그러면서 ‘아 난 여기서 진짜 Nobody구나’ ‘아 잘해서 연기를 잘해서 얘네들한테 보여주는 길밖엔 없다’”라는 생각으로 작품 활동에 집중했음을 토로했다.      


이어 “이런 (작품을) 해야, 그게 나에게 도전이지 뭐, 다른 게 도전이 아니에요. 나도 좋지, 편안하게 일하면. 내가 여기서 어떤 감독들한테 다 ‘야 이리 와 봐, 너 너무 오래 찍는다, 너 이렇게 오래 찍으면 나 간다’ 할 수 있잖아. 지금, 그러니까 그렇게 그런 환경에서 일하면 내가 아마 발전을 못 할 거예요”라고 말해 진정한 ‘관록’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 타이틀 사진=영화 ‘여배우들’ 윤여정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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