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내 편. 인간은 일생일대의 최고 자산인 내 편을 소유하기 위해 이성을 탐색한다. 누군가는 물질적 능력을, 누군가는 정서적 공감대를 우선 조건으로 들지만, 이상형으로서 이성은 결국 무형이든 유형이든 능력 있는 사람, 나의 안녕을 위해 물질적 정서적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인간이 품은 평생 내 편에 대한 바람을 이뤄질 수 없는 신경증적 망상으로 만들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 속 주인공은 평생 내 편을 찾는 이들이 꿈꾸는 이상형으로, 시대마다 달라지는 이성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결혼에 대한 인식 변화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최근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비인간화다. 멜로, 로맨틱 코미디 등 로맨스 속 주인공이 소위 ‘실장님’으로 상징화됐던 재벌 2세, 3세에서 벗어나, 인간의 외양을 했지만 인간은 아닌 초인으로 대체됐다. 능력 있는 남자와 열심히 사는 여자, 로맨스의 뻔한 남녀 힘의 공식에서 늘 승자였던 ‘재벌 실장님’은 자신보다 더 강력한 초인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줬다.
주인공이 인간에서 초인으로 대체된 드라마는 현실계에서 환상계로 들어갔다. 현재 tvN에서 방영 중인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이 들어왔다’)와 ‘간 떨어지는 동거’는 ‘이상형은 그저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벗어나 상상에서라도 이상형을 마주하고 싶은 인간의 바람을 대리 충족 해준다.
‘멸망이 들어왔다’의 멸망(서인국)은 신도 인간도 아닌 중간자로, 인간에게 멸망의 고통을 안기는 신의 사자(使者)이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탁동경(박보영)은 자신에게만 진짜 모습을 들키는 멸망을 통해서만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간 떨어지는 동거’의 신우여(장기용)는 인간의 간을 먹는다는 허무맹랑한 전설을 비웃는, 사람을 홀리는 외모를 가진 시니컬한 구미호다. 신우여는 이담(혜리)이 여우의 빨간 구슬을 삼켜 1년 시한부 위기를 맞게 했으나, 시한부의 삶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멸망과 신우여는 동경과 담에게 장밋빛 미래를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구원자다. 좀 더 현실적 언어로 바꾸면 자아실현으로서 결혼, 즉 이성을 통해 자아 정체감의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현대인의 이성관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혼과 부부 생활을 연구해온 사회심리학자 엘리 J. 핀켈은 그의 저서 ‘괜찮은 결혼’에서 2014년 한 연구에 기술된 학생의 답변을 통해 ‘배우자 가치’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그 학생은 “저는 정말로 제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 제가 최선의 모습이 되도록 돕는 사람이 배우자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엘린 J. 핀켈은 “이 학생의 말은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 효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아 표현의 시대 핵심을 찌른다. 사람들은 모두 여러 형태의 자아를 지니고 있는데 대부분은 진정한 혹은 최고의 자아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진정한 혹은 최고의 자아를 이끌어낼 배우자를 찾는다”라면서 부족한 자신이 대상을 통해 완벽해지기를 기대하는 이중성에 관해 언급했다.
이 같은 자아완성으로서 사랑을 현실계에서 충족하려는 시도는 자본주의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지금, 망상이 되고 있다. 계층 사다리가 활발하게 기능했던 경제성장기에 결혼은 물리적 성공의 하부 요인으로써 ‘오직, 사랑’이라는 단순 논리가 통용됐다. 지금 물리적 성공뿐 아니라 정서적 성장이 중시돼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에 인생을 내맡기기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이성을 찾고 있다.
이런 이유로 불확실한 감정만 증폭하는 현실계 인간들은 사랑과 결혼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다. 불확실함이 두 배가 되는 인간 이성과 현실적 관계를 맺기보다 차라리 아이돌의 팬이 돼 그들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 삶을 더 행복하다고 믿는 시대가 됐다. 실제 유명 아이돌 팬 중에 결혼 적령기의 2, 30대 여성층이 상당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가상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관계에 더 충족감을 드러내는 최근 경향을 입증한다.
이 같은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K팝 열풍이 가라앉고 있지 않다. 이는 드라마에서 초인의 출현으로 연결된다. ‘실장님’ 캐릭터는 실제 이기적이다.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사랑을 지키는데 할애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재벌 실장님 옆에서 늘 인형처럼 웃고 있어야 하는 현실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이런 인간 주인공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배우자 가치를 충족하는 초인이 출현했다. 드라마 속 환상계 이상형은 최근 청년들이 희망하는 확실한 미래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약속하는 미래는 인간의 도움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과 초인이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로써 인간과 초인이 새로운 이상적 관계로 자리 잡는다.
멸망은 나약한 인간 본질에 대한 원망을 하고 있고, 신우여는 인간이 되지 못한 채 999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멸망의 원망과 신우여의 인간 되기는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또 현대의학이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가진 동경, 역사박물관 큐레이터가 되는 꿈을 가진 담에게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멸망과 고려 현종 13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역사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한 우여는 완벽한 인생 안내자다.
환상계의 이성의 등장으로 결말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그래서 이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죽을 때까지 영원히, 라는 결말이었다. 반면 환상계 로맨스들은 ‘따로 또 같이’의 전혀 다른 결말을 만들어냈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간 도민준(김수현), ‘호텔 델루나’의 이승을 떠난 장만월(이지은)은 연인 앞에 예고 없이 등장하거나 그들 곁에 있다는 느낌만 들 뿐이다. 초기 환상계 드라마들의 이 같은 결말에 시청자들은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사랑이 꼭 ‘영원히 함께’라는 결말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서인국은 사자라는 설정에 맞게 음울한 섹시미로 ‘멸망’ 이미지를, 장기용은 999년의 세월을 살아 삶 자체가 무덤덤해진 시니컬 섹시미로 ‘신우여’ 이미지를 표현한다. 과거 재벌 실장님은 출생의 비밀로 인한 사실적 아픔이었다면, 이들은 삶이라는 실존적 아픔이라는 점에서 쓸쓸함의 깊이가 다르다.
이는 과하지 않게 적당히 절제된 의상으로도 드러난다. 서인국은 팬츠, 터틀넥 스웨터, 트렌치코트까지 블랙으로 통일해 사자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또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품이 넉넉한 아우터는 사자인 자신 역시, 그토록 경멸하는 인간의 나약한 면을 가진 존재임을 드러낸다. 장기용은 베이지 톤의 따스한 컬러를 기본으로 한 세련된 베이식 스타일로, 시니컬하지만 매력적인 구미호 신우여를 무겁지 않게 표현한다.
이들의 쌍꺼풀 없는 가늘고 긴 눈은 나른하면서도 시니컬한 섹시미를 부각해 해맑은 미소 뒤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품고 있을 듯한 상상을 키운다.
멸망과 신우여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매력적인 외양과 타인 앞에서 무모하리만치 당당한 모습으로 환상계의 만화적 이미지를 완성한다. 극 중 이들의 매력에서 시각적 요소는 미끼에 불과하다. 이보다 비인간적인 능력이 이들의 매력을 배가한다. 현실계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 주인공들에게 확실한 미래를 약속할 수 없지만, 환상계 남자들은 여자들이 원하는 완벽한 삶으로 안내한다. 이는 현실 인간관계의 소멸을 암시해 드라마를 가볍게만 볼 수 없게 한다.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적인 우울감을 가진 멸망과 신우여는 동경과 이담의 곁을 맴도는,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인간 이성과 대조를 이룬다. 동경의 전 남친 조대한(김지석)과 담에게 치근덕거리는 계선우(배인혁)는 자신을 절대 매력을 가진 존재로 이상화하는 부질없는 시도로 오히려 인간적 한계를 드러내고 멸망과 신우여에게 신성의 매력을 부여한다.
사회심리학자 옌스 푀르스터는 그의 저서 ‘에리히 프롬’에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을 벗어던져야 한다. 나르시시즘은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왜곡한다”면서 “사랑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자신의 사랑이 상대의 사랑을 불러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사랑의 신뢰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프롬의 ‘사랑의 기술’ 중 한 대목을 언급했다.
또한, “프롬이 말하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타인과 세상과 심지어 신과 하나라는 말은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자아를 확인한다는 의미다”라며 자아 정체감에 내제한 상실과 구축을 사랑과 연결해 설명했다.
‘멸망이 들어왔다’와 ‘간 떨어지는 동거’의 인간과 초인의 사랑은 자아 정체감의 상실과 구축을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준다. 판타지 로맨스는 상상에서 시작해 현실을 비집고 들어와 사랑과 결혼을 통과의례 밖으로 밀어내고 인간마저 소외한다. 최근 청년층의 비현실적 욕망을 탓하기에 이들을 판타지 드라마로 밀어 넣는 ‘결혼이 생의 지옥이 될 수 있는 현실’은 그저 무겁기만 하다.
* 타이틀 사진=tvN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서인국, 박보영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