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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Jul 07. 2021

가장 담대한 주인공, 영화 속 ‘해녀 할망’

해녀는 전문 잠수부와 같은 잠수복을 입고 바닷속 깊이 들어가지만, 산소통을 매지 않는다. 해녀 의상은 차별의 역사이면서 강인한 여성상의 상징이기도 하다.  

     

과거 물옷은 짧은 바지에 옆트임을 줘 만삭까지 바다에 들어가는 해녀가 불편 없이 입도록 했다. 이처럼 기능적으로 설계된 디자인으로 인해 되레 선정적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 산소통 없는 현재의 잠수복은 해저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오래 버틸 수 있는 편안함을 마다한 것으로 눈앞의 이익만 좇지 않는 해녀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드러낸다. 이처럼 의상만으로도 해녀의 삶에 속 깊은 인생관이 배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녀를 소재로 한 영화 ‘계춘할망’(2016년), ‘빛나는 순간’(2021년)은 제주 지역의 왕초 해녀 할망이 주인공이다. 과거 해녀의 은퇴 나이가 55세였다고 하지만, 현재는 55세 이하 해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노령화됐다. 극 중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해녀 계춘(윤여정)과 진옥(고두심)은 70세를 넘겼지만, 현직 해녀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간 인생의 빛과 그림자가 그대로 담겨있다.      


해녀들에게 경력이 많은 할망은 정신적 지주다. 이들은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해녀 공동체의 수장으로, 혈연의 생계뿐 아니라 공동체의 생사를 책임진다. 혈연으로 묶인 가족주의와 비혈연 공동체의 공존을 이끈 해녀의 삶은 현대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화 '계춘할망' 김고은 윤여정, '빛나는 순간' 고두심 지현우


‘계춘할망’의 계춘과 혜지는 혈연보다 깊은 정을 나누고, ‘빛나는 순간’ 진옥과 경훈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편견을 깬 사랑을 한다.      


‘계춘할망’은 “바다가 넓어, 하늘이 넓어”라고 묻던 어린 혜지의 물음에서 시작된다. 12년이 지나 계춘 앞에 혜지는 바다가 넓다고 말해준 계춘의 말을 잊었다. 그러나 계춘에게 바다는 하늘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진,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혜지는 계춘의 해녀로서 삶이 배인 바다의 너른 품으로 인해 되레 자책감에 빠져든다. 결국 계춘의 손을 잡고 들어간 바다를 그린 그림을 남기고 사라진다. 손을 꼭 잡고 빛이 들어오는 바다 표면을 향해 올라가는 혜지와 계춘의 모습이 담긴 그림에서 혜지의 마음이 읽힌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자 혜지의 인식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은 혜지와 계춘이 함께 바닷속을 유영하는 장면이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갖춘 혜지는 산소통 없이 잠수복만 입은 계춘의 손에 의지해 두려움 없이 바다를 즐긴다. 혜지는 계춘의 바다에서 진심을 느끼고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깡마른 계춘에게 투박한 검은 잠수복은 한없이 무거워 보이지만,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혜지의 환한 미소는 계춘에게서 잠수복의 무게를 걷어낸다. 혜지의 미소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졌음을 직감한 계춘은 다시는 그 무거운 잠수복을 입지 못한다.         


  

영화 '계춘할망', '빛나는 순간' 


리사 시는 자신의 소설 ‘해녀들의 섬’에서 바다를 어머니의 자궁에 비유했다. 소설 주인공 영숙은 힘들고 지칠 때 자기 삶의 터전이자 어머니가 숨을 거둔 바다를 찾는다. 영숙은 “나는 미자와 오늘 밤의 수영을 고대했다. 아니면 얕은 물에 앉아서 몸 주변을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즐길 수도 있었다. 치유, 진정, 회복. 그렇게 있으면 기운을 눈곱만큼도 쓸 필요가 없었다”라며 ‘자신을 부르는 바다’라는 표현으로 본능적 끌림을 드러낸다. 이처럼 바다는 해녀에게 위험하면서도 가장 안전한 공간이다.      


영숙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랬듯이 바다에서 위험한 순간을 맞닥뜨린 딸에게 가장 깊은 신뢰를 준다. 딸 민리가 물질 짝인 완순을 바다에서 잃어버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딸을 물 밖으로 내보내는 대신 딸의 손을 잡고 바다로 들어간다. 영숙은 애기해녀로서 역부족인 위험한 곳까지 들어가려 하는 딸의 손을 이끌고 무사히 물 밖으로 나온다.      


‘빛나는 순간’의 진옥은 딸을 떠나보낸 바다에서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숨비소리를 연습했다. 숨비소리는 바다뿐 아니라 팍팍한 현실을 견디는 그만의 방식이다.      


진옥은 바닷속에서 나오지 않는 자신을 향해 무작정 뛰어든 경훈을 어렵게 구해내고, 둘은 마치 오랜 울분을 토해내듯 눈물을 쏟아낸다. 경훈이 제주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책망하며 “물숨을 마셨어”라고 토로한 후 서럽게 우는 장면은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못하는 이들마저 울먹이게 한다.      


계춘과 영숙, 진옥은 바다에서 대상과 가장 깊은 애정과 신뢰를 나눈다. 이 작품들에서 바다는 연인들이, 가족들이 행복한 한때를 묘사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낭만적 장치가 아니다. 위험하지만 들어가야 하고, 위험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위험과 위안이 공존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영화 '계춘할망', '빛나는 순간'


고두심은 지난 2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18회 아시아 필름 페스티벌에서 ‘빛나는 순간’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고두심에게 생애 첫 해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빛나는 순간’은 햇볕으로 인해 거뭇거뭇해진 얼굴에 입고 벗기 힘든 잠수복까지 해녀 일상을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다. 특히 고두심이 투박한 고무 소재 잠수복 위에 덧입은 꽃무늬 조끼는 해녀들의 일상적 착용법이지만, 그가 펼쳐내는 멜로 감성을 자극하는 효과를 낸다.      


해녀들이 물옷이 아닌 잠수복을 입게 되면서 영화 속 진옥처럼 꽃무늬 조끼를 덧입기 시작했다. 잠수복과 꽃무늬 의상의 조합은 tvN ‘보이스4’에도 등장한다. 4회 에피소드에 등장한 해녀 할망 고순례(성병숙)와 상군 해녀(최지연)가 입은 꽃무늬와 줄무늬 상의는 해녀의 현재성을 부각한다. 이 같은 덧입기 해녀들이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빛나는 순간’에서는 잠수복과 함께 테왁이 경훈과 진옥의 교감 매개체로 기능한다. 해녀의 명줄을 쥔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테왁에 대한 경훈과 진옥의 대화는 진옥의 감정이 타인의 평가 대상이 아님을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숨비소리가 떠난 딸을 대신한 것처럼 어디서든, 얼마나 떨어져 있든 눈에 띄는 금색 문양이 들어간 형광빛 분홍색의 테왁이 경훈을 대신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영숙과 진옥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바다를 원망하지 않고 해녀들의 한이 배인 숨비소리로 자신뿐 아니라 동료와 가족을 지킨다.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역사적 파고를 겪어온 제주 해녀들은 낭만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다. “꽉 조이는 거 징글징글해”라는 진옥의 말처럼 잠수복은 해녀들의 고된 삶을 더 고되게 단련한다.       


‘해녀들의 섬’에서 시어머니 도생은 “뭍에서는 어머니가 되지만 바다에서 슬퍼하는 과부가 될 수 있다. 지구 전역에서 큰 파도로 밀려오는 소금 눈물의 바다에 네 눈물이 보태질 것이다. 나는 이걸 알고 있다. 네가 살려고 애쓰면 너는 잘살아갈 수 있다”라며 영숙을 독려한다.      


해녀들은 가장 담대한 이 시대 주인공이다. 특히 제주 해녀들의 담대함은 그들에게 아직은 현재인 제주 4.3 사건 같은 역사적 사건과 뿌리 깊은 가모장제 등 지역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묵직한 잠수복에 연철을 찬 채 테왁에만 의지해 깊은 바다 한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가는 해녀, 그들의 삶은 잠수 옷의 무게와 그와 전혀 상반된 덧없이 가벼운 해녀 장비만큼이나 극적이다.


이들 작품은 해녀들의 희로애락의 삶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린다. 그러나 이마저도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라져가는 또 다른 낭만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 타이틀 사진=영화 '빛나는 순간' 고두심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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