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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Oct 22. 2023

#9. 게으른 완벽주의

2023년 10월 20일 19:00

오전 5시 일찍 잠이 깼다. 다시 잘까 잠깐 고민하다 지난 금요일 저녁 일정을 마치고 나서 일지 정리를 못 한 것이 생각났다. 사실 나는 바로바로 일처리를 하지 않는다. 못한다. 일지도 마찬가지다. 인턴 시절 교수님이 상담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정리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늘 강조하셨지만, 일단 일정이 끝나면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가거나 집에 와 거실 불을 다 끄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불빛 앞에서 나초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드라마를 본다. 금요일을 마감하는 의식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2시간쯤 앉아있다 12시가 넘어 1시쯤 되면 잠이 든다.   

    

이 시간의 편안함을 포기할 수 없기도 하지만, 실은 생각의 공간이 비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것이 진짜 이유다. 성향인지 지능지수 탓인지 물론 둘 다이겠지만 하루를 밀도 있게 꽉꽉 채운 일상을 살지 못한다. 스케줄을 시간대별로 빼곡하게 채우고 그걸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미션 완수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은 존경스럽지만, 솔직히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한때는 나의 게으름을 자책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의 이런 게으름이 싫지 않다.        


그런데 인턴 시절 동료가 일지를 뒤적뒤적하며 미리 하지 못해 출근 전에 가까스로 마쳤다며 한숨 쉬는 나에게 뜻밖의 말을 던졌다. “너무 완벽주의 아니에요.” 내가 완벽주의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제야 내가 세워놓은 틀이 견고하다는 것을 알았다. 경직돼 있다는 표현이 맞을까. 나는 뇌가 일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맑아질 때를 기다려 집중해서 한 번에 한다. 일단 시작하면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내가 생각한 구성과 전개가 충족될 때까지 손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일을 할 때도 마감에 가까스로 맞추는 것이 다반사였다. 미리 하면 좋겠지만 뇌가 일할 준비가 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내 방식이기에 게으름을 피울 수밖에 없다. 이런 내가 완벽주의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내가. 그러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완벽주의가 완벽한 결과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았다. 완벽하지 않을 바에야 하지 않겠다는 생각.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기 위안을 한다. 미루고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무능을 탓하며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J는 후자였다. 아마 전자였으면 상담소를 찾지 않았겠지만. 독립 브랜드 디자이너로 직원 없이 디자인에서 생산을 모두 다하는 J는 패션에 오래 종사해 온 오너 디자이너였다. 자기 브랜드를 하고 싶어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가방 독립 브랜드를 만들었다. J는 주요 쇼핑몰 입점 제안을 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일 처리 습관이 항상 발목을 잡았다. 입점하려면 물량과 출고시기를 맞춰야 하는데 시기를 맞추기 어렵다는 생각에 계속 거절만 하고 있었다. 혼자 간헐적으로 마켓을 돌아다니며 판매할 때는 문제 될 게 없었는데 브랜드로서 외형이 조금씩 커지면서 J의 이런 성향은 문제로 또렷이 부각됐고 입점을 조건으로 한 팝업 매장 제안을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J는 한동안 집안에 칩거하면서 팔리지 않고 쌓여있는 가방 더미 속에서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지난 주 상담을 정리하다 보니 나와 J가 중첩되면서 지난 주말 팝업 매장은 잘 정리됐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한남동에 J의 제품이 전시된 편집매장을 둘러보기 위해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팝업 매장을 잘 마쳤으면 아마 한남동 매장에도 새 제품이 나와 있지 않을까. J를 만나기 전에 뭔가 준비가 필요할 듯했다.      


오후 4시쯤 한강진역에서 내려 이태원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마치 주말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이태원 사고 이후 한동안 조용하던 거리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꼬르소 꼬모 매장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그곳에서 2주전 J가 나에게 보여준 앙증맞은 미니 토트백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매장 맞은편 카페로 들어갔다. 매장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지, J의 가방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지 관찰할 겸 창가에 앉았다. 30분쯤 앉아있으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남자친구와 매장에 들어가 이것저것 둘러보다 J의 가방을 메고 환하게 웃었다.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 불과 얼마 안 돼 그 가방을 멘 채 밖으로 나왔다. 나도 기분 좋게 카페를 나와 상담소로 향했다.      


7시가 거의 다 됐을 무렵 J가 좀 전에 봤던 그 가방을 메고 상담소로 들어왔다. J의 표정은 밝았는데 한편으로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저 좀 전에 그 가방 봤어요. 오랜만에 산책했는데 그 매장에서 정말 예쁘게 생긴 여자가 바로 그 가방을 메고 나오던데요. 반응이 좋은 거 같던데.” 먼저 말을 건네자 J의 표정이 완전히 풀렸다. “정말요?”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걱정했어요. 왠지 선생님이 가 보시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어떤 거 같아요? 잘 팔릴까요? 그 봤다는 여자는 어떤 스타일이었어요?” J가 질문을 쏟아냈다. 지난 주말 팝업 스토어 반응이 좋았는데 그 쇼핑몰의 입점 요구 조건을 맞추려면 혼자서는 도저히 일정이며 비용이 감당이 안 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번에 팝업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전 제 미루는 습관 때문에 인생 낙오자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 제품을 저 혼자 만족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주변에서 제 디자인을 좋아해 주지만 그것도 지인이라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팝업에 온 사람들이 가방에 관해 말하는 이런저런 말들에 휘둘리지 않더라고요.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은 제 디자인의 의도를 알아줘서 좋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아 저 사람에게 필요한 거는 그런 것들이구나, 하면서. 정리가 된다고 할까요. 선생님 말씀대로 일단 부딪히니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히더라고요.”        


J는 작은 마켓을 돌아다니며 판매만 하고 규모 있는 쇼핑몰의 팝업 제안은 늘 거절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고, 그런 곳에서는 아마 하루 종일 한 개도 팔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기면 자신이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아직은 더 하고 싶은데 현실을 알게 되면 버틸 힘이 없을 거 같다고. 자신은 좀 더 갖춰질 시간이 필요하다고. 아직은 준비되지 않았다고. 올해 39세의 그녀는 디자인 경력 14년 차에 신규 브랜드 론칭 경험이 많은데도 디자이너로서 자기 능력의 확신이 없었다. “제 친구들은 제가 이런지 몰라요. 저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고. 그들의 말로는 제가 결정을 단호하게 밀어붙이고,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는 거예요. 웃기죠. 제가 그렇게 보인다니. 그렇다고 제가 잘난 척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J는 사람들의 그런 말들에 하나하나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런 말들을 듣고 집에 오면 더 위축돼 우울감에 시달렸다.       


J와 J의 디자인 경력, J의 손을 거쳐 간 브랜드, 지금 하고 있는 독립 브랜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의 재정 상황을 살펴보고 그가 자기 꿈을 위해 투자 가능한 금전적 시간적 여력을 점검했다. J는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될지 감을 잡았고 고민하기보다 움직여 할 때라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과를 생각하면서 겁먹고 자기합리화에 빠지지 않고, 자기 속도대로 가되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업무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로 자신과 약속했다.      


J는 39세에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 브랜드 론칭한 후 힘들어하다 도피하듯 결혼한 선배의 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자기 브랜드를 하려면 좀 더 일찍 독립했어야 했다고. 그래서 급한 마음에 서둘러 서른여섯에 회사를 그만 두고 서른일곱이 되자마자 브랜드를 론칭 했다. 그런데 막상 회사의 그늘에서 벗어나니 사방이 장애물이었다. 계속 걸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그러다 준비 없이 의욕만 가지고 회사를 박차고 나온 자신을 탓했다. 회사에서는 자기가 맡은 디자인만 하면 됐지만, 생산까지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계속 할 수 없다는 생각, 사람들이 제품을 보고 비웃을 거라는 생각에, 결정을 계속 미루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J의 취약점은 하나를 믿으면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J는 자신의 경직된 사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제 J는 자신이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이 습관은 무능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자신에게 납득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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