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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Oct 22. 2023

10. EPILOGUE ; 외로움

고독사. 한때는 그저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였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됐다. 현대인의 병으로 불리는 외로움은 더 이상 추상적 메타포가 아니다. 정서적 신체적 사회적 질병의 실체로서 현대인들의 삶을 참혹하게 만들고 있다. 영국이 2018년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를 신설하고, 전 미국 공중보건위생국장 비벡 H. 머시가 ‘우리는 다시 연결돼야 한다(together)’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외로움과 외로움이 초래하는 심각한 질병 때문이다. 비벡은 이 저서에서 육체적 몸에만 초점을 맞춘 의학적 치료 교육이 의사 생활 현장에서 자신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했는지 말하고 있다. 


정맥주사로 마약을 주입하다 심장판막이 감염된 중독 환자가 관계 결핍으로 마약에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알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관계의 부족은 애초에 중독의 원인이 되며 향후 환자의 마약 재중독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외로움을 평가하거나 해결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니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비벡은 의학 교육의 한계를 논하기 이전에 성장을 기치로 내달려 온 현대사회가 ‘외로움’의 존재를 방치하고 있고, 이런 방치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강조한다.     

 

S가 소리 공포증을 앓게 된 시작이 된 부모님이 없는 텅 빈 어둡고 컴컴한 집이었다. 고립에 익숙해지다 고독해진 S는 학교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배우기도 전에 경쟁사회에 진입해 소리가 불편하고 때로는 두려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기회를 박탈당했다. 일찍 치료를 시작했으면 별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던 소리에 대한 불편감은 두려움이 되고 결국 공포증이 됐다. S는 고민을 나누고 해결해야 할 대상을 찾지 않고 술과 대마초와 함께 고립과 고독으로 병들어 갔다.   

   

우울증을 호소했던 한 중년 남자는 “우연히 대마초를 접하게 됐어요. 술에 취했을 때였죠. 잘 나간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였어요. 감각적인 일을 하는 소위 말해 ‘예민한’ 부류들이었죠. 사실 일을 하려면 그들과 얽힐 필요가 있었는데. 말하자면 그들 부류가 되는 거죠. 그런데 저는 태생이 촌놈이라. 대마초를 처음 피웠을 때는 역했어요. 구역질을 했죠. 그런데 그들의 편이 되려면 촌스럽게 굴어서는 안 된다. 이 생각뿐이었죠. 그런데 결국은 보세요. 전 혼자예요.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기 위해 대마초까지 하면서 발버둥 쳐댔지만, 결국 저는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혼자예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예민한’ 부류들의 문제를 일으켜 업계에서 퇴출당하면서 대마초는 한 번의 아찔한 경험으로 끝났다. 그러나 강렬한 소속 욕구를 불러일으킨 소외감은 극복되지 못했고 깊은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다.      


성형중독인 한 30대 여성은 자신을 상담소에까지 끌고 온 엄마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제 얼굴이 예쁘면, 아니 최소한 평균치 수준이라도 되면 사람들 앞에서 좀 더 당당해질 수 있을 거 같아요. 전 말이죠. 제가 일하는 곳은 집안 학벌 외모 모든 게 갖춰진 사람들뿐 이예요. 그런데 전 평범한 집안에 지잡대. 그래요 그것 그렇다 쳐요. 바꿀 수 없으니까. 그런데 얼굴. 얼굴은 바꿀 수 있잖아요. 수술대에 누워서 몇 시간만 참으면 되는 거예요. 엄마는 돈만 주면 되고, 전 누워만 있으면 되는 거죠. 그럼 전 말이죠. 전 말이죠. 그들과 같아지는 거예요. 그럼 전 그들 앞에 당당할 수 있고, 그들은 저를 같은 부류로 대해주겠죠. 더 이상 지질이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는 ‘나’가 아닌 ‘우리’가 되고 싶어 했다. 엄마는 딸이 “성형에 미쳤다. 성형 때문에 딸이 망가졌다.”라고 울분을 통했지만, 딸은 다른 ‘나’가 아닌 같은 ‘우리’가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을 가장 가까운 엄마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현대인은 결핍이 있고, 결핍을 채워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소비사회에 최적화된 호모 컨슈머스(Homo Consumus)로 길러지고 있다. 기업은 ‘소비=개성’, 소비하면 남다른 나가 된다고 설파하지만, 소비는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다. 늘 나보다 잘난 누군가가 나타나게 되는 결핍은 종결 없는 무한궤도다. 결국 결핍은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되고 현대인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 스스로 소외하면서 고립과 고독에 빠져 허우적댄다. 외로움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아무도 없이 오로지 나 혼자인 환경적 외로움,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이질감과 이탈감을 느끼는 소외된 외로움. 어떤 형태이든 간에 외로움은 사람들을 정서적 궁핍과 궁지로 몰아넣어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여기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이 된다.      


X의 분노는 타인을 향해 거친 분노를 쏟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들과 같지 않은 ‘나’, 고립된 ‘나’를 향한 분노이다. X의 분노는 스스로 고립하는 데서 한 발 나아가 범죄의 형태를 띠게 됐다. 나를 향한 분노는 타인을 향한 적대감을 키우고 나의 못남이 타인의 잘남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X의 세상에서는 진실이었다. 우즈홍은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에서 “외로울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과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혼자 극적으로 상상해 진실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자아를 봉쇄하는 생활 방식은 내부 순환에서 완성된다. 상상으로 천만 가지 감정을 자신의 세계에서 소화하고 발전시키고 썩게 한다.”라며 외로움이 초래하는 피해망상을 경고했다. X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건강하게 소화하지 못해 분노라는 덫에 걸려 망상에 시달리다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까지 무너뜨렸다.        


로맹 가리는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외로움이 얼마나 참혹한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0세 남자 대학생과 벽을 사이에 두고 발견된 죽음도 파괴하지 못한 아름다운 금발 머리 여자, 두 구의 시선은 현대의 소통 부재의 단절된 사회가 얼마나 외로움이 극한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지 서글프게 그린다. 한 남자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작은 방 한 칸이 전부인 곳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을 찾은 법의학자는 그가 남긴 유서에서 마음을 뺏긴 옆방 여자의 쾌락의 신음소리에 힘들어하다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확인하기 위해 문을 두드린 그는 그 여자 역시 비소 중독으로 몸부림치다 남자가 죽던 바로 그 시간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사 같은 그녀의 쾌락에 겨운 신음 소리는 그러잖아도 고독과 낙담과 총체적인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마음에 일격을 가한 것 같네. … 그녀가 죽은 이유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 때문이었네.” 이 짧은 단편은 어떤 해석도 필요 없다. 외로움은 죽음을 초래할 정도로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명쾌한 메시지가 오래도록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 글의 에피소드들은 모두 팩트 같은 픽션이다. 그러나 글을 읽다 보면 각자의 사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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