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6일 18:00
한동안 금요일 오후가 뜸했다. 일정이 없는 날은 굳이 상담소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에스프레소 바의 커피와 함께 즐기는 아무도 없는 상담소의 평화로운 저녁이 좋아 기분 좋게 집을 나선다. 2주쯤 그렇게 금요일 저녁의 충만한 평화를 즐겼다. 그런데 오늘 오전 갑자기 잡혔다는 일정과 함께 오늘은 조금 일찍 출근하는 게 좋겠다는 메시지가 왔다.
오늘 읽을 책을 생각하며 들떠 있어서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잡힌 일정에 설렜다. ‘오늘은 뭘 입지. 오랜만의 상담인데.’ 혼자 웅얼거리면서 집을 이러저리 돌아다니자, 엄마가 부산스럽다며 타박했다. “엄마, 왜, 그 실크 셔츠 어디 있어? 아, 왜 그 블랙에 동물 프린트 있고. 아, 왜 있짆아.”라며 투덜대자, 엄마는 “그때 빨래 잘 못해서 프린트가 바래서 못 입는다고 난리 쳤잖아.”라며 귀찮다는 듯이 답했다. 나는 “뭐라고? 그게 얼만데, 엄마. 그걸 못 입게 됐다고? 이거 현실이야?”하며 한탄 섞인 화를 냈다. 엄마는 “너, 그거 세일해서 산 거 라며. 십만 원대 초반이라며. 또 거짓말했네. 그러게 어째 그 가격이 아닌 거 같더라니.”
사실 난 옷 가격을 가족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그저 “세일해서 산 거야.“ “아, 그거, 얼마 안 해.”라며 상대가 집요하게 질문하지 못하게 묵살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추궁에 시달리게 되고 나이 들어서 불필요한 고집이 세진 엄마의 걱정을 자극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는 내가 시달리기 싫어서가 정확한 표현이지만.
결국 나는 카멜 베이지 바탕의 유니크한 패턴이 있는 실크 셔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원래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 만족스러웠고 오늘 하루가 그리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엄마는 나가는 나의 뒤통수에 대고 “저건 또 얼만지. 얌전히 입어. 뭐 묻혀 와서 오늘처럼 이 난리 만들지 말고. 나이 들어도 그 버릇은 못 고치니 원.”이라며 한숨을 쉬더니 ”잘 다녀와.“라며 자신을 다독이듯 배웅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모두 진실만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한다. 진실은 거짓보다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진실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바로 눈앞에서 상황을 같이 지켜보고 있어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저마다 다르고, 저마다 다른 해석을 거쳐 각기 다른 진실이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각자의 다름을 품고 있는 진실을 상대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고 그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 때로는 강압이라 생각한다. 진실의 폭력. 나의 이런 논리 전개 성향을 모두가 궤변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이런 나의 궤변을 들어주는 동료들이 있는 지금이 이 순간이 행복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니 어느 순간 에스프레소 바 앞에 와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마침 소장이 있었다. “오늘은 더블샷 에스프레소가 좋겠어요. 쉿. 그냥 마셔요. 저기 올라가면 지금, 이 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내가 커피에 설탕을 넣으려 하자 “안 돼요. 그냥 마셔요. 정신 번쩍 들게.”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 커피를 두 번에 나눠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여기 한 잔 더. 설탕 챙겨가고. 저 위에서는 설탕이 필요해질 거예요.” 그의 따뜻한 미소가 오늘은 왠지 스릴러의 전조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상담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임이 “선생님한테 유독.”이라며 신청서를 건넸다. 신청서는 다르지 않았다. 29세, 여성. 유튜버. 우울. ”왜, 제게 굳이 ‘유~독~’이라는 표현을 하셨을까요?”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 그게 그건 본명이고. 옆에 보이죠. 이름 옆 괄호 안에 작게 쓰여 있는 글자. 왜 그걸 써놨는지 궁금해서 생각해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다 싶어 검색해 봤더니. 자 여기 보세요. 이분이예요.”하면서 화면을 보여줬다.
‘처참할 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단테 신곡-’이라는 글귀가 마치 커다란 붓으로 빨간 물감을 어지럽게 칠한 것 같은 시뻘건 화면 위에 쓰여 있었다. “며칠 전 뉴스에 나왔잖아요. 유명 유튜버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병원을 통해 온 것도 아니고 오늘 아침에 갑작스럽게 연락이 와서 잡힌 일정이에요. 원래 이렇게 일정을 성급하게 잡지 않는데. 소장님께 말씀드리니 우선 선생님이 가능한지 알아보라고 하셔서 연락드렸어요. 그분이 금요일 저녁 8시를 원하셔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걱정하시 마세요. 제가 힘들면 도와주실 거잖아요. 일단 시작해 보죠. 학교를 나오면 정글이라더니. 진짜네요.” 나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뭔 일 있겠어.’라며 신청서를 훑어보고 신청자의 인스타그램과 신청자와 관련된 기사를 검색했다.
소장의 과거 이력과 한남동이라는 위치로 인해 유명인들이 마치 숨어들듯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대개는 이런 이들은 평일 오전 시간을 원한다. 아무래도 그 시간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에 반해 금요일 밤은 이들에게 위험천만이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힙한 술집과 클럽들이 즐비한 이 동네에서 이 시간에 상담받으러 온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에게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보호색처럼 술을 마시러 왔다는 핑계로 숨어들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 또한 이유가 될 수 있다.
P 또한 그랬다. 저녁 7시 55분 상담소 문이 스르르 열리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핏기 없는 가늘고 긴 손가락과 피빨강 손톱이 먼저 보였다. 갑자기 따뜻해서 서늘하게 느껴졌던 소장의 미소가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오늘 진짜 스릴러.’라고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경쾌하게 끝을 살짝 올리는 “안녕하세요.” 인사와 함께 워시드 와이드 데님 팬츠에 레그 오브 머튼 슬리브의 화이트 셔츠를 입고 블랙 미니 샤첼백을 든 키 167cm의 여성이 나타났다. 화장기가 짙지 않은 하얀 얼굴에 삘간 립스틱을 바르고 레이어드 컷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질감의 단정한 중단발까지 매력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나를 확인하자 다시 한번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저 어디로 갈까요?”라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도 장난기가 발동해 “여기, 숨, 쉼 2개의 방이 있어요. 두 방, 모두 지금은 비어있고, 어떤 방을 들어가질지는 당신의 선택입니다.”라며 응수했다. “그럼 간단하게 두 방에 관해 소개해주시겠어요? 제 선택에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순간 나는 ‘아 이 사람, 보통이 아닌데.’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 소개가 미흡했네요. 저의 상담소는 아시다시피 숨과 쉼에요. 소장님이 ‘숨 막히는 일상을, 쉼이 허용되는 삶으로’ 만들자는 메시지를 담았죠. 그에 따라서 방 이름도 숨과 쉼으로 정했어요. 그래서 숨은 숨 쉬는 공간, 쉼은 쉼이 되는 공간을 의미하죠. 자 이제 당신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P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경쾌함이 사라지고 순간 진지해졌다. 한 1분쯤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톤이 바뀌어서 “전 숨으로 갈게요. 일단 전 숨을 쉬어야 돼요.”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간 ‘내가 너무 장난스럽게 말했나.’하며 후회가 몰려왔다.
자리에 앉아있는 P는 처음 상담소를 들어올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게 차분해졌다. 사실 차분하다기보다 침울함에 가까워 보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모른 척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이렇게 급하게 일정이 잡히는 경우가 드물어서. 신청을 받으신 선생님께서 저에게 급하게 자료를 넘겨주셨는데 신청서에 낯익은 글자가 있어서 검색해 봤어요. 그런데 예상대로 그 이름이더군요. 제가 미리 본 것은 인스타에 있던 한 장의 사진과 몇 개의 기사입니다. 사실 기사는 제목만 보고 내용은 읽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보들은 과장이나 왜곡이 있을 수 있어서 상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았습니다.” 사실 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전문가인 체하는 것만큼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른 체 하는 것도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진솔함을 택했다.
“전 사실 Y대 지방 캠퍼스예요. 사실 그것도 아니죠. 입학만 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 집이 어려워서 돈이 필요했다거나, 부모님에게 학대받았다거나 그런 스토리텔링은 제게 없어요. 부모님 두 분은 교수세요. 아빠는 경제학과, 엄마는 수학과. 상상이 되세요? 사실 두 분이 Y대 교수시죠. 그러고 보니 학대받지 않았다는 말을 수정해야 하나?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단지 부모님과 동문이 될 정도로 열심히 하지 않은 거죠.” 솔직하게 말하는 듯하던 P가 말을 약간 비틀기 시작했다. ‘열심히 했다. 그런데 동문이 될 정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대개 ‘열심히 하면 붙을 수 있었다.’ 혹은 ‘어차피 열심히 해도 안 됐다.’ 중 하나인데 P의 말에는 자기 능력에 관한 언급을 묘하게 뭉그러트렸다. 지금 이것을 짚고 넘어갈 단계는 아니라는 판단에 이야기를 이어지도록 했다.
“사실 저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전 학교에는 흥미가 없었어요. 제가 거기서 뭘 배우겠어요. 집에 이미 교수님이 두 분이나 계시는데. 그때부터 인스타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제 일상을 올리는 거로 시작했죠. 점점 사람이 모이더라고요. 그런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저와 비슷한 10대를 보내는 청소년들에게 멘토가 되고 싶었거든요. 저의 글귀 하나하나가 그들에게 희망과 생각의 빛이 되는 거죠. 그걸로 저는 만족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여전히 P의 말은 같은 패턴이었다. 진솔하게 말하는 듯하다 문장을 뭉개서 진의를 판별하기 어렵게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방식. 계속 이렇게 듣다 보면 머리가 아플 거 같았다.
“제가 그들에게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전 솔직했어요. 다들 저한테 증명하기를 원했죠. 그래서 증명해 주려 했던 것뿐이예요. 그들은 제가 살아남은 게 싫은 건가요? 왜 여전히 저를 지탄하죠?” 말하는 내내 그는 마치 누가 미리 써준 대사를 읽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는 점점 침울해지는 듯했지만, 솔직히 말해 P가 말을 하는 내내 나에게 감정이 전달되지 않았다.
P의 방문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P는 Y대 명문대생의 개념 있는 엘리트 ‘철학 명품녀’로 인기를 끌었다. 일부 10대들 사이에서 그가 하는 말은 절대적으로 신봉됐고, 연예인보다 더한 팔로우 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P가 한 말들이 거짓이 밝혀지면서 ‘짝퉁 엘리트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내게 한 말도 거짓이었다. 그는 세간에 알려진 Y대가 아닌 Y대 지방 캠퍼스라고 했지만, 지원만 했을 뿐 합격한 내역은 확인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모두 Y대 교수라고 했지만, 강사였고 딸이 세간에 논란이 되면서 강사직마저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그가 상담 당일 하고 온 명품은 물론 인스타에서 화제가 됐던 옷, 가방, 신발 모두 명품 대여 전문 사이트에서 정기 결제로 주문해 입은 것들이었다.
P의 말은 사실 솔직하면 문제될 게 없는 것들이었지만 98%의 사실에서 2%의 포장을 덧씌우면서 작은 거짓말이 파동을 일으켜 수습 불가의 큰 거짓말이 됐다. P는 그래서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P는 2%의 거짓말로 포장된 자신의 삶이 98%의 진실을 뭉개버리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내가 P의 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P가 상담을 계속했을까. 나는 그가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나마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만들고 거주하는데 끝나지 않고 전시하고 관심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위태롭다. 그가 그 위태로운 시한부 행복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