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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Oct 22. 2023

#7. 사람을 끌어들이는 은둔자

상담소는 늘 조용하다. 내가 다들 퇴근한 6시에 출근해서이기도 하지만, 간혹 오전에 출근해도 금요일 저녁 혼자 있는 시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정적, 고요, 침묵. 사실 이보다는 평온에 가깝다. 소리 없이도 오가는 잠재적 소통이 있고, 점심, 짧은 1시간에 주어지는 해방된 수다 타임, 각자 일정이 없는 막간에 ‘숨과 쉼’ 방에서 이뤄지는 탐색 타임처럼 공적인 소통도 있다. 그래서 상담소에 오면 편안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연결이 있어 외롭지 않다. 철저하게 혼자인 상태로 고독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되, 결코 고립을 허용하지 않은 연결이 이뤄지는 공간.      

   

그런데 정작 이 공간은 만든 설계자인 소장은 여기서 볼 수 없다. 상담소에서 그를 보기가 쉽지 않다. 요청하면 언제든 시간을 내고, 긴급한 사안이 있으면 언제든 필요한 순간 우리와 함께하지만 아주 잠깐뿐이다. 사실 그는 내가 처음 건물 진입을 망설이다 들어간 에스프레소 바를 가면 언제든 볼 수 있다. 그는 상담소라는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공간에서 자진 이탈해 있다. 그가 자발적으로 상담을 찾는 때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새로운 인원 보강을 위한 면접이 있거나, 그날 그랬듯이 새로 구입한 책을 가져다 놓을 때. 


상담소는 운영 매뉴얼이 있고, 각자 그것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이곳의 암묵적 규율이다. 새로운 인원이 보강되면 가장 선임이 매뉴얼을 상세히 알려주고 이를 성실히 이행하는지 여부는 감시가 아닌 각자 서로 크로스체크를 하면서 이뤄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돼있는 상담소에서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면접을 봐야할지 망설이다 처음 이곳 에스프레소 바에 들어갔을 때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둘러보니 유리방 안에서 로스팅 기계 앞에 등을 지고 앉아있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다른 때 같으면 유리방 문을 두드려 내 존재를 알렸겠지만, 그날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바에 앉아서 기다렸다. 5분쯤 지나 문을 열고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미안하다며 주문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커피 로스터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그저 나의 로스팅 카페 리스트 목록이 추가됐을 뿐이었다. 면접을 하고 다음 주 근무 첫날이라 출근을 조금 서두른 금요일 오후 5시 에스프레소 바 문을 열었는데 30대 남자가 아닌 소장이 바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놀라서 뒷걸음치는 내게 그는 미소 지으며 바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로스팅 카페를 만나게 되면 로스터들과 원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일상사까지 나누지만, 소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시,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익숙한 이름과 얼굴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혹시“라며 운을 뗐다.      


소장은 ”맞아요. 이력서 봤을 때부터 알아볼 거로 생각했어요.“ 묘한 인연이다. 기자와 PD의 만남이라니. 소장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 방송국에 입사했지만, 예능국으로 발령이 났다. 버라이어티 예능 전성시대에 한두 편을 성공시킨 이력이 있는 그는 제작 과정에서 출연자들의 개인사로 인한 논란, 악마 편집 논란을 겪으면서 PD로서 정체감 혼란에 빠져 힘든 시간을 보냈다. 원치 않는 예능을 만들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그는 사표를 던지고 다큐멘터리 제작사로 이직했다. 그런데 막상 옮긴 곳은 운영난으로 허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하청업체에 불과했다. 잘 나가는 지상파 출신 예능 PD를 영입한 제작사는 그의 방송사 이력을 발판으로 재미있는 예능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했지만, 그는 그에 동조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 회사에서 ‘잘난 엘리트 왕따’가 됐다.      


”당신의 이력서를 보고 뭐랄까. 동질감, 연민, 뭐 그런 게 느껴졌어요. 당신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게 주변 누군가에게는 허영으로, 누군가에는 치기로 보였겠구나. 저는 당신이 찾고 싶은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찾으려 하는 것을 이곳에서 꼭 찾을 수 있기를 바라요. 혹여 찾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이곳에서 겪는 것들이 당신의 여정을 의미 있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는 동네 사람들은 물론 화려한 거리를 헤매다 길을 잃어 찾아든 이방인들을 에스프레소 바에서 맞는다. 그들은 처음에는 기분 좋은 커피 향에 빠져들다 커피 맛에 놀라고, 어느 순간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해 사적인 힘듦을 쏟아낸다. 처음에는 소장과 누군가 1인의 대화를 시작하지만 자연스럽게 바를 찾은 사람들이 하나둘 그 대화에 끼어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치 비구조화 집단상담 분위기가 형성된다.      


나도 몇 번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소장은 상담소 소속 사람들은 엄격하게 규제했다. 그들의 대화가 이뤄지고 있을 때 상담소 사람들은 접근금지. 그래도 그 분위기를 놓치기 싫은 마음에 밖에서 서성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당신이 상담자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 상담소를 찾은 적이 있었나요? 사실 저도 없었어요. 혼자 고민만 했죠. 그러다 퇴사했고 그러다 업계를 떠나게 됐어요. 그런데 솔직히 아직도 방송에 미련이 있어요. 만약 좀 더 적극적으로 제 마음을 보살펴 줬더라면 아마도 지금까지 연출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예능이든 다큐든. 물론 그게 내가 원하는 결말은 아니지만, 여하튼. 저는 사람들한테 제가 가지지 못한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그게 내가 이 커피숍을 운영하는 이유이고, 제가 상담소와 거리를 두는 이유죠. 그들이 편하게 와서 대화 나눌 수 있게. 사실 제가 상담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비밀이에요. 그저 상담소에 커피를 배달하는 괴짜 중년 커 로스터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계약한 부동산 사장님은 어느 정도 알고 계시긴 한데 입단속을 했죠. 영원히 지켜지는 비밀은 없지만, 그래도.“         


그는 은둔자이지만 고립돼 있지는 않다. 그는 성자가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토닥여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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