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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Oct 22. 2023

#5. 투명 인간

2023년 7월 14일 19:00

이 정도면 신의 저주가 아닐까. 정말 비가 무섭고 끈질기게 쏟아졌다. 장마철에는 정말 집 밖을 나서고 싶지 않다. 이런 날씨에는 사실 집에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집이 물에 취약한 탓에 장맛비로 인한 피해를 크게 본 적이 있었다. 이럴 때는 공부만 하면 되던 학창 시절, 일만 하면 되던 직장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아빠 뒤에 엄마 뒤에서 거센 풍파를 피해 내 일만 하면 됐던 시절, 그때가 때로는 사무치게 그립다.       


20년 넘게 나는 감각을 잃지 않게 노력하는 이성적인 기자로 일하면서 집에서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철없고 게으른 딸이었고, 지인들과 어울릴 때는 재미있고 사교적인 친구였다. 이 피곤한 3중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일을 그만뒀다. 그러나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둘만 남게 되면서 나는 엄마의 남편이자 딸이면서 집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비 오는 날이면, 그것도 장맛비가 시작되는 시기가 되면 나는 엄마 뒤가 아닌 앞에 나서야 하는 투사가 돼야 했다. 어느 것 하나도 내려놓을 수 없는, 삶의 무게. 빗소리가 거세질수록 나는 무언가가 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에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비가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틀릴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게으른 딸로 무위도식하면서 있고 싶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 금요일 저녁 출근 시간이 다가오면서 상담소에서 일정 연기 문자 알림 메시지가 오지 않는지 계속 확인했지만, 집요함이 무색하게 오늘따라 광고 문자 알림만 울려댔다.        


나는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힘겹게 들어 올려 옷장을 열고 베이지 색 크롭트 트렌치 재킷을 꺼냈다. 이 재킷은 얇은 홑겹의 폴리 소재로 비오는 날 적당한 생활 방수가 가능하고 영국 젊은 디자이너의 재기 넘치는 유니크한 디자인 때문에 입었을 때 내가 특별한 사람인 듯한 생각이 들 뿐 아니라 마치 다른 계급을 보는 듯한 타인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 호사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 재킷이 비가 퍼 붇듯 쏟아지는 장마에도 내가 나가야 하는 이유가 돼 줬다. 오늘도  나는 이 옷을 보면서 출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오후 5시 30분, 한남역에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져서 모두 서둘러 퇴근했다는 동료의 문자가 와있었다. 상담소에 도착하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카오 70% 함량의 다크 초콜릿이 책상에 놓여있었다. 나는 진한 만델링 원두로 내린 커피를 초콜릿과 나란히 놓고 사진 찍어 동료에게 전송했다. 장마철이 되면 진한 커피와 초콜릿을 의식처럼 먹는 것이 습관이 됐다. 동료는 나의 이런 취향을 존중해 줬고, 여름 장마가 시작돼 기분이 처질 듯한 조짐을 보이면 초콜릿을 준비해 준다. 동료의 이런 배려가 때로는 장맛비가 기분을 타격하지 않아도 우울해야 할 듯한 의무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오늘은 동료의 초콜릿이 텅 빈 상담소를 꽉 채웠다.         


막 여름이 시작되던 무렵,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봄비가 내리던 한 달 전쯤인 6월 9일 오후 7시 허리를 조이는 가죽 블루종에 가죽 쇼츠, 망사 스타킹에 니하이 부츠를 신은 여자가 로커 같은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상담소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왔다. 영화 ‘레옹’ 마틸다를 연상하게 하는 일자 단발까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40세라는 사전 정보가 아니었다면 아마 30대 초반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작고 동글동글한 이목구비의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마치 학생이 선생님에게 인사하듯 깍듯이 거의 45도 각도로 상체를 숙여 인사하고 난 후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듯 나를 빤히 응시했다.


M이 사전 신청서에 기록한 ‘제가 누굴까요?’라는 호소는 스타일과 태도의 이질성으로 인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학교 상담센터에서 자주 봐온 ‘나에 대해 알고 싶어요.’와는 사뭇 다른 표현법이 당혹스럽기보다 미묘하게 자신을 타자화하는 뉘앙스가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개성 강한 스타일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 있게 상대에게 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패션에 몰두해서 무수히 많은 옷을 사들이며 옷더미에 파묻혀 살았던 때, 패션 추종자로 주변에서 ‘옷 잘 입는다’는 말에 우쭐대던 때, 나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외양으로는 정체성이 또렷한 듯 보였지만, 속은 텅 빈 공허한 이중 자아였다. 여기에 사회생활에서 요구됐던 논리적인 자아,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화를 이끄는 쿨한 자아가 일상의 소심한 자아와 공존했다. 나는 질식사할 정도로 여러 페르소나에 짓눌려 있었다. 이 록시크 모드의 여자도 과거의 나와 같은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연민이 느껴졌다.        


M은 오늘 몸에 밀착되는 민트색의 보디 콘셔스 민소매 원피스에 파스텔 핑크 크로스백과 화이트 스트레토 힐을 신고 등장했다. 너무 극적으로 달라진 스타일이었지만 마치 원래 자신의 스타이었던 듯 자연스러운 태도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늘 힙한 스트리트 룩으로 나타났기에 극적으로 달라진 스타일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저 너무 평범해 보이죠? 어쩔 수 없었어요. 상담 끝나고 그 사람을 만나기로 해서. 제가 이렇게 입고 나가면 그 사람이 정말 좋아하거든요.” M은 지난 5월 남자친구의 권유로 상담소를 찾았다. 접수면접을 진행한 동료가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상담소에 남자친구와 동반했다.      


‘오버사이즈의 탁한 브라운 레드 바이커 재킷에 디스트로이드 스키니 진과 니하이 가죽부츠. 대화를 하던 중 재킷을 벗고 남자친구 옆에 바짝 다가가 앉자, 남자친구가 M의 허리를 감싸 안음. 상담소에 와서는 대개 적당히 거리를 두지만, 이들은 방 안에 마치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음.’ 동료가 꼼꼼히 행동 관찰 내용이다.  


M은 자신이 왜 여기에 온 이유를 모르는 듯 질문에만 수동적으로 답해 진술 기록은 빈약했다. 대신 남자친구의 진술은 구체적이었다. M이 나른하게 하품하자 남자가 먼저 나가 있으라고 신호를 보냈고 남자 혼자 방에 남았다. 남자는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내 동료에게 깍듯하고 예의 바르게 죄송하다고 한 후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제 여친이 어떤 사람인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3일 전 경찰서에 갔어요. 전날 여친과 술을 많이 마시고 재미있게 놀았는데 아침에 이상한 문자가 와 있는 거예요. 정말 실망했다면서 당분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돼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겠더라고요. 저는 전날 여친을 만난 6시 30분부터 헤어진 새벽 3시까지 뭘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친이 정말 즐거워하면서 웃었던 모습만 기억이 나는 거예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몇 번을 뒤돌아보며 제게 손짓을 하면서 아쉬워했던 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서 제가 전화를 한 10번쯤 했을 거예요. 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여친이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으로 가 점심시간까지 기다렸죠. 12시 5분쯤 건물 밖으로 나오던 여친이 제 얼굴을 보면서 사색이 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거예요. 여친이 일하는 곳에서 불과 100미터 거리에 파출소가 있어서 건물 앞에서 바로 보이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파출소 문이 열리더니 경찰 두 명이 제 쪽으로 오더라고요. 설마 했죠. 그런데 제 앞에 멈춰서더니.”      


남자는 M을 만나는 한 달 동안 그 같은 일을 거의 매일 겪었다. 경찰서까지 간 거는 네 번.  그날 저녁 M이 전화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술 마시자고 해 남자는 헤어질 각오로 M에게 상담을 받아보자고 했다. 남자는 사실 자신이 이상한 건지 알고 싶어 상담을 받아보려다 M의 동의 아래 신청자를 바꿨다.       


한 달이 지난 지금 M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꾸준히 상담소를 찾는다. 그러나 남자는 아침저녁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태도를 견디지 못한 건지 상담에 늘 함께 와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M이 지난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 주 만에 M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간 만나온 남자친구들은 늘 M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도대체 뭐야? 너 도대체 누군데? 내가 아는 M 맞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M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생각해 보세요. 저는 제 남자친구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그들 앞에 등장하죠. 그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죠. 그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잔뜩 흥분한 표정을 짓죠. 그들의 그런 표정을 보면 제 미션은 끝나요. 그래요, 끝나요.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뭐랄까, 다시 리셋? 맞아요. 리셋돼요. 제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인사를 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면 이미 그들의 몸은 내일로 가있죠. 저는 그들의 욕구에 충실해요. 그게 제가 할 일이죠. 그런데 왜 자꾸 제가 누구인지 묻는 거죠? 저는 그냥 저예요. 그들 앞에 있는 모습이 바로 저예요.”

     


남자는 여친이 다중인격 것 같다고, 여친도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남자가 M에게 “너 다중인격이야?”라는 질문에 되받아친 것뿐이었다. “그냥 남친이 원하는 말을 해줬을 뿐이에요. 그는 제가 다중인격이길 바랐죠. 늘 자신을 흥분하게 하는 다중인격 여자. 저는 그 모습을 그에게 보여줬을 뿐이에요.”         

M은 늘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모습만 보고 자랐다.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은 이혼하고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도, 아빠도 M을 키우려 하지 않았고 외할머니 역시 원해서가 아니라 양육비와 수고비를 양쪽에서 모두 받는 조건으로 떠맡았다. M은 경제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할머니마저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바라는 말없이 착하고 예쁜 손녀딸 역할에 충실했다. 늘 예쁘게 웃고, 외할머니 말에 잘 따랐다. 그러나 귀찮은 걸 싫어하는 외할머니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질문하지 않았고 그냥 손녀를 키우느라 힘들다는 외할머니의 푸념을 늘 웃는 얼굴로 듣기만 했다.      


한 달에 두 번 엄마가 찾는 주말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빨간색 원피스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하고, 엄마와 자신을 그린 그림을 손에 쥐고 현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M이 재잘거리는 거를 좋아해 엄마가 오면 친구들 이야기를 쉬지 않고 했다. 그러나 사실 M에게는 친구가 없었고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나면 다시 말없이 예쁘게 웃는 아이로 되돌아갔다. 엄마가 왔다 간 다음 토요일이면 머리를 목뒤에서 가지런히 묶고 화이트 프릴 칼라의 블랙 원피스를 입고 거실에 있는 작은 미니 책상 위에 초등학생용 역사책을 펴고 앉아 아빠를 기다렸다. 오전 10시 벨 소리가 들려도 M은 얌전히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게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자신이 키우지는 않아도 전 장모에게 양육비와 수고비로 보내는 돈이 잘 쓰이고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 했고 M은 결과물을 성실히 보고했다. 저녁 8시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아빠가 외할머니 집에 데려다 주면 M은 다시 말없이 예쁘게 웃으며 할머니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착하고 예쁜 손녀로 되돌아왔다.      


M은 그렇게 늘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수시로 바꿨다. M이 “그들 앞에 있는 모습이 바로 저예요.”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게 M이 알고 있는 자신, M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모습. M이 아는 M은 외적 조건으로만 존재할 뿐 마음은 필요하지 않았다. M은 늘 타인의 표정에서 그들의 욕구를 읽었고 시각적 욕구에만 충실했다. 그래서 마음의 존재가 마음은 M에게서 가치 절하돼 희미해졌다. 분명 마음이 있었지만, 엄마, 아빠, 할머니의 마음을 알기에는 8살의 M은 너무 어렸고,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보았던 M이 자기 마음 볼 수 없었다. 그들의 표정과 말을 근거로 사랑받는 딸, 손녀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이것이 그가 타인과 관계 맺는 패턴이 됐다. 리셋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 M이 타인의 마음을 모르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M은 자신을 보는 상대의 표정에서 흥분이 옅어지면 이내 관계를 정리했다. 아니 정리됐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M은 관계를 릴레이로 이어갔다. 그러나 그 릴레이 경주는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한 채 무한반복 되고 있었다.        


엄밀히 M은 투명 인간이다. 살아있지만 누구도 M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다. M 주변 사람들은 M을 각자가 본 모습으로만 M을 기억한다. 불과 한 달여 기간 내가 본 M조차 두 개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M이 세상에 보여준 수많은 모습들에 존재하는 동질성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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