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7일 21:00
오늘따라 유난히 한낮의 봄 햇살이 따스했다. 조금 서둘러 집에서 나와 벚꽃이 피기 시작한 근처 공원을 걸으면 산책했다. 상담소까지 걸어서 40분 남짓. 겨울이라면 엄두도 못 낼 거리지만, 싸늘함이 가신 기분 좋은 봄바람을 맞으며, 에스프레소 바를 목적지로 설정하고 느긋하게 한발 한발 내딛었다. 바에 도착하니 원두 배송으로 우체국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e북 플랫폼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림의 머쓱함을 견디려 했겠지만, 가게 앞을 서성이며 산책의 여운을 즐겼다. 그러다 너무도 당연한 듯 가게 앞에서 나처럼 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3명에게로 시선이 고정됐다.
이럴 때마다 나의 집요함에 놀라곤 한다. 마주침을 애써 피하려는 사람들을 애써 쳐다본다. 핸드폰으로 향한 사람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서서히 시선이 발끝까지 내려간다. 나의 보기는 이내 관찰이 된다. 나의 훑어보는 시선은 의도와 무관하게 관찰이라기보다 관음에 가까워진다. 나의 호기심은 늘 아슬아슬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인지, 인과론을 완성하기 위한 과도한 호기심인지의 분별이 때로는 나조차 쉽지 않다. 때로는 서운함을 넘어 부당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나의 이러한 분별없는 호기심을 간파했던 것은 아닌지, 늘 자문한다.
스쿠터에서 내린 바리스타가 문을 열자마자 창가로 난 스탠딩 테이블에 가방을 올려놓고 버터 스카치 크림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버터 스카치 크림에 한참 시선을 고정하니 망각의 지대로 빠져드는 듯했다. 짧은 망각의 시간은 카톡 알림으로 종결됐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채 5분도 남지 않아 에스프레소를 세 모금에 다 비우고 서둘러 상담소를 향해 길을 건넜다.
불이 켜진 상담소를 보니 동료들을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레 층계를 리듬을 타듯 올라갔지만 문이 잠겨있었다. 그때야 카톡 알림을 듣고도 확인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카톡을 확인하니 모두 먼저 간다는 메시지와 함께 오후 7, 8시 일정이 다음 주로 연기됐다는 공지가 와있었다. 상담 일정표가 열려있는 컴퓨터 화면에 핑크색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혼자여도 혼자 아닌 거 알죠?’ 글씨체와 문구만으로 누군지 알 거 같았다. 조금은 위로가 됐지만, 사실 오늘만큼은 동료들이 필요했다. 6개월만에 잡힌 Y의 9시 일정으로 마음이 무겁고 긴장됐다. 그런데 이 무게를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 명치를 짓눌렀다.
금요일 저녁 9시, Y는 이 시간을 고집했다. 매주 이 시간에 상담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Y는 이 시간을 의식처럼 여기고, 때로는 상담사인 나를 제사장처럼 숭배하기도, 원망하기도 했다. 두서없이 쏟아내는 Y의 말은 고장 난 녹음기로 반복 재생해 원래 내용과 무관하게 원 의를 상실하고 소리만 남은 소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6개월 만에 다시 상담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일주일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난해 69세, 올해 70세가 된 Y는 이중 국적 소유자로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채 50세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다 60세에 한국에 정착했다. 30살,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한국으로 파병된 동갑내기 재미교포 군인을 만난 Y는 미군과의 결혼을 감추고 싶어 한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친지들만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만 간신히 치르고 떠밀리듯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뉴요커,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던 Y의 삶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무참히 무너졌다. 말이 뉴욕이지, Y는 상상하는 뉴욕과는 다른 퀸스 한인 타운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그러나 주변 한인들과 달리 Y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이런 노력으로 10년 만에 작은 한인 식당을 운영하며 나름 안정된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 제대 후 자동차 수리 일을 했으나, 크고 작은 내전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다른 이들처럼 술과 도박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일을 계속하지 못했고 가정 경제는 고스란히 Y가 책임져야 했다. 그래도 Y는 어떤 상황에도 편을 들어주고 부인을 최고로 아는 한결같은 남편의 마음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20년의 삶은 고단했지만,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않았다.
문제는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민 1.5 세대 교포로 사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했다. 아들을 위해 미국행을 택했던 시어머니는 적응 못 하는 아들을 지극히 한국적 사고로 군대로 보냈다. 사실 남편은 군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해 Y를 만난 한국을 마지막으로 군 생활을 접었다. Y를 따라 뒤늦게 한국 생활을 시작한 남편은 이곳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Y는 남편을 위해 미국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다 결국 10년이 지나서야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생활은 절대 녹록치 않았다. 사실 미국에서 돈은 벌었지만, 아들에게 식당을 넘겨주고 귀국한 Y는 넉넉하지는 않아도 사는 데 부족하지는 않았으나, 열심히 사는데 익숙해 식당 일을 시작했다.
Y는 늘 의자에 앉자마자 비슷한 말을 쏟아냈다. “선생님 죄송한데요. 남편이 어제 아침 일찍 나가서 밤 12시 다 돼서 들어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제가 본 건 뒤통수가 전부예요. 전 하루 종일 식당 부엌에서 어깨가 빠지도록 철판만 닦다 왔는데. 10시부터 제가 전화를 계속 걸었는데. 잠도 못 자고. 그런데 고작 뒤통수라니. 그래서 제가 ‘야 이 새끼야, 내가 니 뒤통수보자고 하루 종일 철판 닦았는지 알아.’ 이랬죠.”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나쁜 말을 했어요. ‘배워 처먹은 게 있어야지.’ 제가 이러더라고요.” 늘 이렇게 ‘죄송’으로 시작해 스스로 전제한 ‘나쁜 말’을 보고했다. 그러나 ‘죄송’ ‘나쁜 말’이라는 표현과 달리 말을 쏟아낸 후 Y의 표정은 항상 의기양양해 보였다.
일지를 되짚어 보는 게 의미 없게 느껴질 정도로 늘 한결같지만, 그래도 회기마다 미묘한 변화는 있었다. 화자와 행위자가 뒤엉키고 주어, 서술어, 목적어가 다 제각각이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상황 파악이 불가능했던 Y의 말이 그래도 점점 주어와 서술어가 맥락 있게 엮여 갔다. 이 과정에서 남편에게 쏟아내는 말들을 스스로 듣기 시작했다.
Y는 남편에게 하는 말들을 세세하게 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종결 단계에서 Y가 남편에게 했던 ‘나쁜 말’을 정리했다. ‘이 병신 새끼야, 니가 뭔데 감히.’ ‘너 바보야. 그걸 말 따위라고 해.’ ‘배워 처먹은 게 있어야지.’ ‘니가 사람 새끼냐.’ 말을 써 내려가면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치 내가 내뱉은 것처럼 텍스트의 글자 하나하나를 키보드에 치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시장 한복판에 아귀다툼하고 싸우는 듯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 반이 남아 이어폰으로 지난해 회기 중 가장 치열하게 자신을 감정을 드러낸 축어록을 틀었다. 이어폰을 통해 Y의 거친 욕설이 귀를 거처 뇌를 타격하면서 1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 생생하게 당시 상황이 재현됐다. Y와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거친 말들이 나를 향하는 것처럼 생각됐다. 그러다 순간 뇌리에 박힌 단어를 뽑아내 다시 Y에게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꾹꾹 참으면서 Y에게 남편의 입장이 돼 볼 것을 제안했다. 제안. 그게 과연 제안이었을까. 상황의 객관화라는 명분 아래 한 제안이지만 실은 ‘제발 그만. 듣기 싫어.’가 진의였다. 에둘러 하는 이런 침착한 제안이 실은 치졸한 항변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Y의 남편이 돼 Y 앞에 앉아 그가 느꼈을 모멸감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대리인으로 Y에게 따지듯 쳐다봤다. 이때 내가 하는 말은 고작 “남편에게 잘해야 된다, 남편이 잘했다가 아니에요. 당신이 ‘나쁜 말’이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표현한 ‘나쁜 말’을 쏟아낸 후 당신이 느끼는 불편감에 관해 말하는 거예요. 남편에게서 한 발 떨어져서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자신에 물어봐 주고 감싸주세요.” 이게 전부였다. 얼마나 치졸한 변명이었나. 사실 Y가 자신의 감정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왔어야 했다. Y는 힘들다고 말하는데 상담자는 정작 남편이 얼마나 힘들지 떠들어대다니 어불성설 아니었나.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해져 녹취록을 멈추고 눈을 감고 있는데 쥐구멍이라도 파고들어 가고 싶었던 정말이지 힘들고 부끄러웠던 상황이 떠올랐다. 당시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선생님. 저 오늘 안 늦었죠.”라며 경쾌하고 밝은 목소리와 함께 Y가 센터에 들어왔다. 약간 허스키한 톤의 Y의 음성은 70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Y는 자연스럽게 늘 들어가던 ‘숨’ 방에 앉자마자 “선생님, 저 오늘 칭찬받아야 돼요.”라며 내가 들어가기도 전에 말을 시작했다.
“어제 남편이 새벽 2시가 돼야 들어왔는데 제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남편이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데 제가 그 사람을 그냥 보고만 있더라고요.” 그때 어떤 심경이 이었는지 묻자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어요.” Y의 말에 마음이 아파서 “당신의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아프네요. 당신이 많이 슬프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Y가 고개를 돌리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다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주책이죠. 아 어떻게.” 눈물을 멈추려 애쓸수록 설움과 뒤엉킨 Y의 눈물은 흐느끼는 소리를 제외한 상담실의 모든 소음을 제거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Y는 “그런데 제가 선생님 왜 칭찬받아야 하는지는 아직 말하지 않았죠. 제가 그때 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갑작스러운 Y의 ‘죽어야지’라는 말이 마치 스위치처럼 뇌리에 박혔다. 나는 깜짝 놀라 “네? 그게 무슨 말이죠?” Y는 그때까지 한 번도 자살 사고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혹시 자살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나요? 상담 초기에 힘들어서 죽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있다고 했지만, 그냥 스치는 생각이었고 자살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했잖아요?”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Y에게는 그렇게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했네요. 선생님 놀라셨나 봐요. 그게 자살까지는 아니고, 그냥 편하게 가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요.” 이어서 나온 Y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미국에서부터 안락사에 관심이 많았던 Y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주로 이사할 계획까지 세우고 수면제를 모았다. 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수면제 복용은 그저 수면 장애 때문이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한국이 예전과 너무 다른 경쟁 사회로 변해 적응하느라 애를 먹으면서 잠을 자지 못해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그런데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수면 장애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먹지 않고 남은 수면제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도 몇 차례 수면 장애로 약을 처방받았고 주변 지인들에게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며 그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지고 있는 약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집에 쌓여 있는 수면제 양이 꽤 된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절대 먹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저 수면을 위한 안전장치 정도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간 Y의 아픔의 강도를 축소하고 통찰하게 한다는 이유로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를 강요한 섣부름을 자책하고 나의 부적절한 감정적 동요를 직시하는 않은 무지를 탓했다. 3주 후 종결 회기를 하고 난 후에도 한동안 불안했다.
이후 2개월 간격으로 세 차례 만난 후 6개월이 지나 Y가 센터로 전화해 상담을 한 번 더 요청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9시를 앞둔 8시 55분 센터 밖에서 각기 다른 두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마치 멈추고 걷고 멈추고 걷는 것처럼 일정하지만 다소 간격이 있는 구두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뚝뚝 바닥을 치는 지팡이 소리와 질질 끌리는 신발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이어 이내 문이 열리더니 오른손을 미세하게 떨면서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걷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부축하고 들어오는 여자가 센터로 들어왔다. “선생님.” 끝을 살짝 올리고 단어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발음하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늘 늦지 않으려고 집에서 일찍 나왔어요. 보시다시피 이 남자와 함께 오려면 시간이 두 배로 더 들거든요. 오늘은 얼마나 기특한지 선생님 만나러 간다니까 자신도 꼭 보고 싶다고 따라온다잖아요.” 당혹스러웠다. 기분 나쁜 게 아닌 텍스트 그대로 ‘당혹감’. 남편과 함께 상담실에 들어가겠냐고 물어보니 Y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남편은 센터 들어오기 전 화장실에 들렀고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어서 앉아서 좀 쉬어야 한다고 했다.
“저이 봤죠. 작년 마지막 상담을 마치고 한 달쯤 지나서 미국에서 아들 부부가 나왔어요. 아들이 대뜸 아빠가 걷는 게 좀 이상하면서 병원에 가보자고 해서 진찰을 받았는데. 아시죠. 파킨슨. 저이가 글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식당일 그만두고 저이만 따라다녀요. 내 팔자가 그렇죠 뭐.” 그런데 이상하게 ‘팔자’라는 단어가 마치 ‘평온’으로 들렸다. Y는 센터를 들어설 때 표정부터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는 Y의 이런 변화가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 Y의 과거 말이 생각났다. “제가 처음 이태원에서 남편을 봤을 때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러운 남자가 있을까 생각했죠. 정말 놀랐어요. 사실 제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요. 그냥 좋았어요. 내가 이 남자를 돌봐주고 싶었어요. 아이 같은 모습이 정말 좋았거든요. 웃기죠.” 나의 이런 생각들이 읽혔는지 Y는 “맞아요. 저 사람은 이제 제가 옆에 없으면 안 돼요.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미져리’ 같은 생활은 아니니까. 보시다시피 저 사람은 혼자서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해요, 조금 둔하고 느리기는 해도 혼자 알아서 다 할 수 있죠. 그런데 저랑 같이 다니고 싶어 해요.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다 관심을 갖죠. 의심은 아닌 거 같아요. 의심이 아니에요. 그저 관심, 관심이죠.”
Y의 남편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낯선 미국에 갔다. 6살 꼬마는 할머니 집에 남겠다고 울면서 호소했지만, 아들을 위해 이민을 결심한 부모님이 어린 그의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 그 이후의 삶에서도 그는 부모님의 선택에 끌려다녔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Y를 만났고 역시나 결혼 생활에서도 Y의 선택을 따랐다. 중년이 돼 40년 만에 한국에 정착하면서 그는 서서히 반항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부모님을 향한 반항이었지만 부모님과 Y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게 Y는 아내이면서 보호자였다.
Y 역시 마찬가지다. Y는 동갑이라고 했지만, 남편은 Y보다 7살 연하였다. Y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들 둘을 키웠다는 말이 그냥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었다. Y는 남편을 자기 아들처럼 대했고 남편은 그런 Y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익숙했다. 무엇보다 경제력이 없었기에 Y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뒤늦게 달라진 환경에서 독립을 꿈꿨다.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서 노인 대상으로 영어 회화를 가르치면서 서서히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 그는 Y의 보호가 족쇄처럼 생각됐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Y와 Y의 남편은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로 되돌아가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두 사람이 떠나고 혼자 센터에 남은 나는 깊은 혼란에 빠졌다. 저들의 평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저들의 평화에 의문을 가질 자격이 있는 걸까. 두 사람의 표정만 보면 그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행복한 표정 이전의 분노가 여전히 행복 밑 심연에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