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철학의 풍경들>을 읽고
책을 관통하는 한 가지 커다란 생각은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 지각과 그 무언가에 대한 표현. 이 책에선 ‘현상의 지각, 지각의 현상’이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다. 이는 모든 예술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예술이건 자신이 지각한 것으로부터 의미가 그리고 그로 인한 작품이 생겨난다. 따라서 자신이 하는 예술에 답이 있다기보다 자신의 삶을 치열히 산 사람에게 예술의 답이 있는 것 같다. 인식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지각한 것의 의미를 말하는 깊이에의 강요(사진철학의 풍경들 226p) 부분이었다. 나 역시 흥미롭게 읽었던 쥐스킨트의 소설이다. 깊이가 있어야 할까? 나는 언제나 작품을 바라볼 때 이것이 깊이 있는 사유에서 나왔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면서 본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아는 건 참 많은 것 같은데, 정말 깊이가 있는 걸까? 계속 의심하면서. 이 소설에 나오는 화가와 작가들은 자신의 깊이를 찾는 과정에서 깊어지고 무거워진다. 혹은 고립된다. 생각은 무엇을 정의 내리거나 의견을 만들기 마련이고, 이는 깊어짐과 함께 생각의 단절, 끝맺음을 가져온다. 그것이 주인공인 화가에게는 자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가벼운 것에 끌리기 시작했다. 사유는 깊어야 하지만 표현까지 깊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책에서도 나온 마르셀 뒤샹의 샘을 보자. 샘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에게 단연코 깊이 없는, 예술(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을 모욕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샘에는 세상과 예술을 관통하는 뒤샹 고유의 철학이 있다(책에서, 그리고 모든 평론에서 이야기하므로 반복하지 않겠다). 이것은 단연코 예술 역사의 위대한 사건이다. 현대인들은 이로부터 예술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뒤샹은 작품의 의미, 사유의 깊이를 가볍게 표현했다. 가벼움으로써 무거워지는 것. 역설은 항상 사람들을 흥미롭게 한다.
그리고 또 한 번 방향을 바꿔서, 꼭 의미가 깊어야 할까? 에 대한 의심까지 뻗어나갔다. 가벼운 것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지! 우리의 삶은 항상 사소하고 가벼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이 모여서 나를 만들어내고. 무겁고 깊다고 생각했던 나 또한 가벼운 존재로 유영하게 한다. 가볍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고, 다양한 길이 열릴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도입부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 언급하며 삶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항상 깊이 있는 의미에, 작품에, 사진에 끌릴 것이다. 언제나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 할 것이다. 그러한 갈팡질팡의 시간들이 나를 깊이 있게도 혹은 가볍게도 만들며 넓혀줄 것이다. 정해진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에포케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진이나 책에 대한 얘기보다 의미의 깊이와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결국은 이 생각들이 모든 것을, 그리고 사진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조금 이야기를 바꿔, 내가 관심 있는 피사체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내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의 ‘미와 진리 혹은 사진 예술의 근원’(위의 책 231p) 장에서 하이데거의 문장이 나온다.
진리는 존재이며, 드러남은 시간이다.
존재의 시간이 그것을 진리로 이끈다. 개인적으로 꼭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시간이 어떻게든 그 존재를 드러낸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나는 낡고 허름해진 사물을 찍는 게 좋다. 사물이 존재해온 시간을 마주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이고 나는 집중만 한다면 사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언젠가 동네에서 아주 높은 오래된 벽을 발견했다. 두껍고 좁은 벽이었다. 그 벽은 오래돼서 잡초가 자라나고 틈이 갈라져 사이로 거뭇거뭇한 곰팡이가 슬어있고, 가운데는 역시 갈라지고 뒤틀린 나무판이 녹슨 못에 박혀있었다. 이건 그냥 낡은 벽이다. 그러나 나에게 의미를 가진 특별한 벽이 되었고, 나는 그 벽을 사랑하게 되었다.
시간은 겹겹이 쌓이고, 반대로 사물은 겹겹이 벗겨진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반복한, 벗겨지고 낡은 시간의 흔적은 존재의 이야기가 되어 많은 것을 말하고 노래한다. 낡은 것들(갈라진, 마모된, 녹슨, 기울어진, 삐걱거리는, 탈색된, 긁힌…)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다. 하나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즐거움. 나는 그 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벽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일 뿐, 카메라는 잊기 위해 기억된다.
존 버거가 한 말이다(위의 책 24p). 나는 뒷 문장에 집중했다. 잊기 위해 기억된다. 나는 그 벽을 잊기 위해 찍었을까?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고 난 뒤 벽은 나에게 무거운 역사가 아닌 내가 사랑했던 벽으로, 추억으로 기호화되고 가벼워졌다. 혹은 더 깊은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벽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것의 존재를 사랑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마침내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고 그것이 내게 체화하는 의미를 갖는다. 무겁다.
또한, 나는 어떤 것이든 찍는다. 내게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 떨어지는 햇빛, 잡초, 이상하게 생긴 의자, 그 순간의 하늘, 사람들의 동작, 건축물… 이 사진들은 내 시선에 대한 기록이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말해주려고 혹은 모티프로 쓰려고, 그 날을 기억하려고 등 이유는 갖가지다. 한 가지 공통점은, 사진으로 찍고 바로 잊는다. 언제든 사진첩을 뒤적이면 다시 볼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 동시에 잊기 위해 찍는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냥 한 줄의 기록이다. 지금 실재를 자세히 보지 않아도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는.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
이렇게 내게 사진은 가볍고도 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찍으면서 나는 이 사진이 무거운 사진인지 가벼운 사진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보며 그것의 깊이를 또다시 생각한다. 가벼웠던 게 무거워지기도 하고, 무거웠던 게 가벼워지기도 한다. 가볍게 찍은 사진들은 항상 뒤적이며 되새김질 해 무거워지지만, 낡은 벽의 사진은 보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어 구석에 넣어두고 내 안에서 가벼워진다. 내게 사진 찍기는 이 의미의 시소놀이를 가장 손쉽게 구현하는 행위이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항상 에포케의 상태에 있을 것이고 앞으로 계속해서 갈팡질팡 할 것이다. 의미의 경중을 따지며, 가벼워지려고 노력하다 또다시 깊어지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2013년에 과제 제출하느라 쓴, 5년이나 묵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러 달라진 생각도 있지만 글을 고치기보단 새 글을 하나 더 쓰는게 나을 것 같아 그대로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