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옥인 콜렉티브를 중심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전시가 시작됐다(8.11~11.25). 내가 옥인 콜렉티브[1]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 작년 9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불협화음의 기술: 다름과 함께하기》전시부터다. 이 전시에서 옥인 콜렉티브는 <자기-주도 가이드>를 선보였다. 아래 글은 영국의 빈민가를 찍은 사진 작품 옆에 붙어있던 가이드다.
계급의 유령성, 투명한 빈곤
“외국에서 빈곤의 실존은 ‘슬럼’을 통해서 입증된다. 슬럼은 수만에서 수백만 명이 모여 사는 빈곤 주거지역이다. 범죄, 마약, 질병 등의 소굴이다. 일단 빈곤 주거지역으로 소문나면, 농촌과 외국에서 떠나온 가난한 이들이 모여든다. 한국에는 미국, 남미, 유럽 등에 현존하는 슬럼이 없다. 슬럼의 초기 모델이었던 ‘달동네’조차 사라졌다. 도시 개발이 이들을 몰아냈다. 60년대 청계천, 80년대 상계동, 90년대 난곡 등을 거치며 빈민촌의 거의 전부를 도시에서 밀어냈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효과는 확실하다. 한국인들은 빈곤을 체감하지 못한다. (…) 한국에서 빈곤 노동은 ‘투명 노동’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투명한 인간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가난이 없다 치고’ 사는 일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다.
— 안수찬, 민주정책연구원 연구원 칼럼 “기획특집—그들과 통하는 길”(2011) 중에서.
나는 전시를 볼 당시 이들의 ‘가이드’가 전시 설명문보다도 지금 시대에 필요한 질문과 담론을 작품에서 생산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고 느꼈다. 가이드는 질문을 던지거나, 적절한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관람자의 감상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로 인해 관람자는—작가가 의도한 바와 같이—전시와 작품을 다층적으로 해석하고, 작품이 다루고 있는 문제를 실제 삶에 투영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쉽게 고루해질 수 있는 ‘영구 소장품’—이 전시는 영국문화원의 영구 소장품 중 동시대 작가의 작품으로 이뤄졌다—의 위치를 한정된 시간에 붙박인,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의 현실을 위한 유동적이고 생산적 존재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같은 날, 일민 미술관 《DO IT》 전시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옥인 콜렉티브의 「아트 스펙트랄 art spectral」책자[2]를 보게 됐다. 이 책은 리움 《아트스펙트럼 2016》전시를 위해 제작됐는데, 관람 시간의 제약 상 두, 세 챕터만 읽을 수 있었지만 공동의 장안에서 담론을 이끌어내는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위의 인용글도 이 책에 수록되어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옥인 콜렉티브를 알게 된 과정이며, 그들의 다음 전시를 기다렸던 이유이다.
옥인 콜렉티브의 공동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을 보면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믹스라이스[3]가 떠올랐다. 소외받은 사람들(이주노동자)과의 공동체 활동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그룹이어서, 두 예술 그룹을 '공동체'라는 주제로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난 당시 기회가 되어 믹스라이스의 아트 토크[4]를 방청했다. 토크 마지막에 심보선 시인이 공동체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다음은 내가 토크를 글로 정리한 내용이다.
▪︎심보선 시인의 질문
십 년 전만 해도 다 같이 운동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믹스라이스도 그들과 파트너로 작업을 했고, 우정을 나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강제추방을 당하고,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생산업이 약해지며 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다. 이주 노동자들도 농업, 어업으로 직종이 바뀌면서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힘이 많이 약해졌다. 십 년 전에 세 가지 구호가 있었다. "1. 욕하지 마세요 2. 때리지 마세요. 3. 임금 주세요."
십 년 전에 하던 이야기를 요즘 다시 하고 있다. 길거리에 평범한 트럼프가 너무 많다. 그런 상황이 악화되고 있고, 나아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고 있자면 별로 희망이 없는 것 같고, 절망적이다. 소수민을 배척하는 건 외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 인간은 어떤 지점을 바라보며 가야 하는지, 공동체가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지점이 궁금하다.(…)
▪︎조지은 작가의 대답
공동체라는 개념이 정의 내리기는 힘들지만, 지속성이 중요하다. 믹스라이스도 몇 년간 해오던 MDF페스티벌(마석 가구단지에서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록 페스티벌)을 작년도부터 안 하게 됐다. 모두 흩어져서 행사를 하려면 우리끼리 해야 하는데, 사실 커뮤니티 없이, 소통이 없으면 이 페스티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래도 세대가 달라지고 활동가뿐 아니라 이주민 간에도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커뮤니티 내부 지속성의 문제도 있다. 그런 지점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
작가의 대답에서 기존 공동체가 세대교체와 그로 인해 달라진 소통방식(인터넷이나 SNS 이용 등)에 자연스럽게 적응·변화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한계가 믹스라이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전 세대 사회 활동가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막막함일 것이다. 믹스라이스가 공동체에 대한 예술의 현재 진행적 실천 방식을 명확히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이 상을 받을 정도로 의미 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전 활동들—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동체를 꾸려 행사를 주최한—에 대한 감사와 위로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권운동가만의 위치라고 생각했던 그곳에 예술가의 위치도 있었음을, 그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진정으로 귀 기울이고 그들의 옆에서, 현장에서 함께 연대하는 존재였음을 일깨워주는 전시와 토크였다. 하지만 나 역시 그 뒤로 "공동체를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옥인 콜렉티브는 이 질문에 그들만의 답을 들고 관객을 찾아왔다.
▪︎이정민 작가
저희는 처음부터 이 콜렉티브라는 집단이 가지는 속성은 굉장히 임의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흩어질 수 있고. 인터뷰할 때마다 ‘옥인 콜렉티브 언제까지 활동할 것 같아요?’ ‘내일도 당장 그만둘 수 있어요’라고 얘기한 적 많아요. 어떤 상황이 올 지 모르고, 그래야만 어떤 집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랬을 때, 왜 사람들은 이런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 무리를 이룰까? 혼자일 때보다 더 많은 갈등 속에 있을 수 있는데, 왜 그것들을 유지하려고 하는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미래 사회에 대한 관심, 그것들에 대한 질문이 저희에게는 크고, 또 얘기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장소를 이동하면서 작업을 만들게 된 것 같아요.
첫 번째 질문인 ‘공동체를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답으로, 옥인 콜렉티브는 공동체를 견고하고 지속적인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반대로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지속시키고자 한다. 이는 앞서 소개된 믹스라이스 혹은 이전 세대 공동체의 한계를 훌륭히 뛰어넘는다. 이점은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에 게재된 ‘critic’ 글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6]
그들의 첫 시작이 된 작품 <바깥에서>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 연극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폭죽에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빌고, 텐트를 치고, 살아간다. 폐허라는 장소의 속성상 폐허 위의 시간과 활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 딛고 있는 공동의 장소가 사라지는 불안정성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중심의 부재라는 성격을 띤다. 그들의 활동은 영상으로 기록될 뿐 무엇으로도 남거나 소유되지 않으며 그들의 점령은 끝나가는 잠깐의 시간만을 공유하고 사라진다. 따라서 '임의성'은 콜렉티브의 생성에서부터 부여될 수밖에 없었던 본성이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작가는 첨예한 지점에서 예술가의 실천 방식, 즉 두 번째 질문 ‘예술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까’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이정민 작가
문제에는 보통 대립 지점이 있잖아요. 그 대립점만 보면 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보다는 감각을 바꾸기 위해 놀이, 유머가 작품 속에 들어가요. 이건 우리 작품에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어떤 철학자는 이걸 세속화라고 하는데, 성스러운 것들을 세속화시키면서 만들어내는 또 다른 접근. 놀이라는 부분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작업에서도 이런 요소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남의 문제, 저런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를 내가 바라본다라는 객관적인 시점이 아니라 나도 그 안에서 그 문제를 감각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요.
사회 운동가/인권 운동가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예술가는 어떻게 다른가? 사회적 실천으로써의 예술, 활동가로서 예술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참여자 혹은 관객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문제를 (위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감각하기. 이 대답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만족스러운 답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버지니아 울프)는 말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교육받은 계급의 일원이라고.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속 깊숙이 담아두는 데 실패해 왔다고.❞ [7]
이번 전시에서 옥인 콜렉티브는 제주와 인천 지역 공동체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 <황금의 집>에서는 친구도 없고 더 이상 갈 곳 없는 노인, 노인 중에서도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에 가서 어울려 놀지 못하는 고학력자 노인들이 음악다방 까사 돌을 오며 가며 느슨한 공동체를 맺는다. 인터뷰에서는 노인 스스로 노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노인의 죽음을 '고목이 죽어야 주변 어린 나무들이 자란다'는 비유를 들며 '노인이 계속 사는 건 시간의 정지, 성장의 정지'라고 이야기한다. 그 인터뷰 때문인지, 까사 돌의 공간은 음악이 흐르고 있을 때마저도 시간이 정지한 것과 같은 고요함, 정체감, 안락함이 스며있다.
작품 <회전을 찾아서, 또는 그 반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이 느끼는 인천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이 아닌 주변인으로서 어려움, 그 속에서 반복되지만 유의미한 궤적을 만드는 공동체. 영상은 관찰자 시점의 의견을 더하거나 어떤 결말을 맺지 않는다. 그저 인터뷰 중간중간 인천의 황량하고 버려진—도시에 사는 사람에겐 어딘가 이상하게 비어있는 허전함으로 느껴지는— 풍경이 지나간다.
옥인 콜렉티브가 제시하는 세 영상은 각각 '파국 한가운데서 생겨나는 공동체', '정지된 시간 위에서 음악으로 모이는 성긴 공동체', '인천이라는 변두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예술 공동체'를 조명한다. 그리고 관람객은 영상 사이를 오가며 그들이 공유하는 장면을 감각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각자는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 전시를 보며 여태껏 존재조차 몰랐던 공동체를 만나고, 그들의 감각을 공유해보자. 그리고 각자의 공동체를 상상해보자.
[1]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에 게재되어있는 옥인 콜렉티브 소개글
옥인 콜렉티브(김화용, 이정민, 진시우/2009년 결성)는 종로구 옥인 아파트의 철거를 계기로 형성된 작가 그룹이다. 개발 중인 도시 내에서 대면하게 되는 사회적 문제를 공동체와 개인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관찰하며, 영상과 퍼포먼스,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공동체 내외부의 관객과 조우해왔다. 옥인 콜렉티브는 철거 중인 아파트에 남겨진 주민들과 함께 상영회, 전시, 콘서트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기타 회사 콜트콜텍에서 부당해고당한 노동자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공연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재난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위험사회를 풍자하는 체조를 만드는 등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실행된 옥인 콜렉티브의 작업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틀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개입한다. 미디어 속에서 단순화된 관계와 상황에 내포된 양가적이고 중층적인 사람들의 감정, 태도, 상황을 노출시켜, 근대 도시에서 공동체와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개인과 개인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화해, 연대의 의미와 한계 모두를 다룬다.
[2] 「아트 스펙트랄」 소개글 (출처: 작가 홈페이지)
「아트 스펙트랄」은 ‘사라지는 기술’ 혹은 ‘유령 같은 예술’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업은 ‘아트 스펙트럼’에 대한 메타적 성격을 띤다. 아트 스펙트럼이 동시대 작가들의 역량을 보여주고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때 옥인 콜렉티브는 아트 스펙트럼이라는 말 자체를 키워드로 삼아 현재 한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와 역할, 위치에 대한 생각들을 다루려고 했다.
(…)
오늘날 미술은 무엇으로 유지되며 관람객들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 작업의 중요한 구성물인 책의 필자들은 ‘사라짐’, ‘기술’, ‘유령’, ‘아트’ 그리고 ‘스펙트럼’이라는 일련의 주제어들을 통해 초대되거나 글을 구상했다. 또한 전시장 안에서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어떤 관객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라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아트 스펙트랄’은 예술과 사회라는 거대한 범주 속에서 출몰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자의와 타의에 의해 투명해지는 존재들의 스펙트럼을 구성한다. 이는 있으나 보이지 않고, 보이지만 실체를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증거물 보관소이다.
[3]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에 게재되어있는 믹스라이스 소개글
믹스라이스는 양철모(1977~)와 조지은(1975~) 두 명으로 구성된 미술그룹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인 이주 노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사진, 영상, 만화, 벽화, 페스티벌 기획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가려져있는 (불법) 이주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나 인권 문제에 대한 피상적인 조명을 거부해왔으며,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주’의 상황들, 즉 ‘이주’의 흔적과 과정, 그 경로와 결과, 기억에 대한 탐구 등 다층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믹스라이스는 2006년 이후 마석 가구단지의 이주민 공동체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자생적인 발언과 문화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예술가와 이주노동자가 협업하는 공장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들의 관심은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식되어는 식물들의 ‘이주’ 과정을 추적하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 ‘이주’된 아시아 근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작업으로 끊임없이 확장되며 진행 중이다.
[4] 'MMCA 아트 토크 : 믹스라이스와의 대화'에는 믹스라이스인 양철모·조지은, 디자인 평론가 박해천, 사회학자이자 시인 심보선이 참여했다.
[5] 이 부재는 올해의 작가상 옥인 콜렉티브의 부재 '우리는 왜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되는가'에서 가져왔다.
[6]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에 게재되어있는 'critic' 글.
추천인은 <옥인 콜렉티브>가 이러한 계보를 잇는 예술가들의 소그룹 활동들 중 2010년대 한국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해오면서, 이전 세대들이 지녔던 문제의식이나 형식적 측면에서 확연히 다른 지점들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난 8년 동안 옥인 콜렉티브가 전개해 온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 활동은 (...) 그 방법론에 있어 기존의 사회 참여적 실천들과 차별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 조주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
[7]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이후 출판사, 25쪽.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