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에 관한 세가지 대화들
#1 '평소에 예민하신 편이죠?'
실내. 카페 - 낮
카페 테이블에 남자1, 여자1이 마주 앉아 있다.
남자1 이번에 '어벤져스' 나온 거 보셨어요?
여자1 아니요.
남자1 천만 넘었던데.
남자1이 여자1을 보며 웃는다.
여자1은 딴 데를 쳐다본다.
여자1 전 카페가 싫어요. 카페에서 하는 얘기들이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나중엔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억지로 쥐어짜고. 저는 그런 분위기를 못 견디겠어요.
남자1 저도 그래요.
여자1 진짜요?
남자1 네, 그래서 저는 평소에 미리 이야깃거리를 준비해두는 편이에요. 요새 유행하는 드라마라던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같은 거요.
여자1 그러지 마세요. 여자들은 다 느껴요. 이 남자가 진짜로 하고 싶어서 하는 얘긴지, 아니면 할 말도 없으면서 그냥 하는 얘긴지.
남자1 그래도 어떡해요. 뭔가 얘기해야 될 거 아니에요.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거를...
여자1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좋아하세요?
남자1 아니요.
여자1 이 남자1을 잠시 보다가 눈을 내리깐다.
여자1 우린 남들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사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진짜 좋아하는 것만 말하면서 살고 싶어요.
남자1 사람이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어떻게 살아요.
여자1은 테이블 위의 커피잔을 본다.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잔을 내려 놓고 딴 데를 보는 여자1.
남자1은 여자1을 빤히 본다.
남자1 평소에 좀 예민하신 편이죠?
여자1 네?
남자1 사람들이 하는 말이란게 사실 다 별 뜻없이 하는 거거든요.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여자1 저기요.. 저는 괜찮은데요. 다른 데 가서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남자1 뭐가요.
여자1 제가 진짜로 예민한 사람이라고 쳐봐요. 그런데 면전에다 대고 예민한 사람이냐고 하시면 제 기분이 어떨 거 같애요?
남자1 기분 나쁘세요?
여자1 아니요.
#2 '거짓말쟁이'
실내. 카페 - 낮
카페 테이블에 남자2, 여자2가 마주 앉아 있다.
남자2는 테이크아웃 잔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소리가 나도록 빨아 마신다.
커피가 바닥을 보이자 남자2는 잔 뚜껑을 열더니 입을 대고 남은 커피와 얼음마저 들이킨다.
여자2는 팔짱을 끼고 남자를 본다.
남자2는 얼음을 까드득 씹어먹는다.
여자2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다.
여자2 디게 빨리 마시네?
남자2 (얼음을 씹으며) 어. 더워서.
여자2는 자신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여자2 왤케 날 피해?
남자2 뭘
여자2 답장도 늦고. 예전엔 안 그랬잖아. 변했어.
남자2 뭔 소리야. 내가 바쁠 때 빼곤 꼬박꼬박 답장하고 전화도 하고 다 하구만.
여자2 웃기고 있네. 내가 느끼는 게 있는데.
남자2가 여자2를 보다가 테이블 위 자신의 커피잔으로 시선을 돌린다.
얼음 몇 안 남은 남자2의 커피잔.
남자2가 자리를 일어난다.
남자2 화장실 좀.
혼자 앉아 있는 여자2.
잠시 후 남자2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남자2가 물에 젖은 손을 스윽 바지에 문지르며 자리에 앉는다.
남자2 가끔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 생각날 때 있잖아.. 아예 생각도 잘 안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난히 마음에 남는 사람이 있어. 난 나한테 거짓말한 사람들이 그렇더라.
여자2가 남자2를 본다.
남자2 어떤 애는 나보고 어깨가 왜 그렇게 넓냐고, 눈은 왤케 크고 속눈썹은 또 왤케 기냐고 그랬었어. 웃기잖아.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근데 한참이 지나도 이런 말들과 상황이 안 잊혀져. 무슨 느낌인지 이해 돼?
여자2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여자2 그니까 넌 나한테 계속 거짓말을 하시겠다?
남자2 어.
남자2, 여자2 함께 실없이 웃는다.
#3 '넌 몸만 오면 돼'
실내. 카페 - 낮
카운터의 종업원이 커피머신 앞에서 분쇄원두를 포터필터*(반원형의 아이스크림 주걱같이 생긴거)에 꾹꾹 눌러담는다.
종업원은 커피머신에 포터필터를 끼운다.
기계 버튼을 누르자 졸졸졸 커피액이 흘러 내린다.
카페테이블에 마주 앉은 남자3과 여자3.
여자3 이번 주 토요일에 회사 언니 돌잔치 하거든. 같이 가자.
남자3 돌잔치?
여자3 어. 지은언니. 전에 같이 봤잖아.
남자3 돌잔치는 쫌 그런데...
여자3 나 따라 오는건데 뭐 어때. 넌 그냥 몸만 오면 돼.
남자3 말이 쉽지 몸만 어떻게 가.
여자3 같이 가자. 혼자 가기 그래서 그래.
남자3 희정이는 시간 안 된대?
여자3의 한숨.
여자3 넌 니가 부끄러?
남자3 지금은 내가 사람들 만나기가 여건상 힘들어. 아직 자리도 잡기 전이고...
여자3 뭘 그런 걸 신경 써. 원래 우리 때는 다 그런 거야. 기운내, 너도 금방 좋은 소식 있을 거잖아.
남자3 그래도 남자는 벌이가 있고 없고가 틀려.
여자3 내가 괜찮다니까? 난 니가 어떤 모습이든 아무 상관 없어. 내가 괜찮다고.
남자3 아니, 난 안 괜찮아.
그라인더 기계에 원두를 넣는 종업원.
기계는 '드르륵'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원두를 갈아 버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