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최초로 몸에 칼을 댄 것은 자궁근종 때문이었다. 처음 병원에 진찰을 받았을 때는 자궁에 조그만 혹이 있다고, 양성이기 때문에 당장 치료를 하지는 않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했다. 1년이 지났을 때 배가 아파서 검사를 했더니 크기가 커졌는데 악성은 아니지만 커지면 악성으로 변할 가능성도 많이 있다고 병원에서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권유하셨다. 나는 위험요소를 없애기 위해 수술을 하자고 했고 엄마는 망설였다. 결국 수술을 결정하고 나서는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다. 여성으로서의 상징인 자궁에 대해 수술을 하시게 되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때 나는 엄마의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냥 수술을 하니까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엄마의 자궁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고 그 역할을 다하고 말았다. 나는 거기에서 엄마의 영양을 받아먹었고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머리와 가슴과 손발을 만들었다. 이제 내 생명의 고향은 오직 그 존재의 역할만을 하고 사라졌다. 나는 엄마 몸속의 빈 공간을 채워줄 가슴을 가지지 못했다. 끝없이 받기만 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엄마가 목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때 엄마는 제품 공장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수출을 하는 공장이어서 납기가 가까워오면 밤샘 작업도 많이 했다. 피곤이 누적되어서 그러려니 하다가 마구 땀이 나고 온 몸에 힘이 없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병원에 가니 갑상선 기능 저하 증상이라고 하였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앓는 증상이고 약으로도 많이 치료를 한다고 하는데 그때는 바로 수술을 결정하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가족이라고는 단둘이니 나는 엄마가 입원한 동안 병원에서 살았다. 엄마 침대 밑에 보조 침대를 놓고 자고 낮에는 엄마 수발을 들었다. 병원에 있으니 하는 일이 없어도 왜 그렇게 피곤하고 졸린지, 엄마가 아픈데도 졸고 있어서 엄청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그 수술은 엄마 목에 긴 상처의 흔적을 남겼고 엄마는 그때 이후로 잘 부르던 노래가 고음 불가로 바뀌었다.
엄마는 덩치가 크고 체중도 많이 나가는 편이다. 아줌마의 보편적인 체형인 상체비만 하체 부실 형이다. 중년이 넘어가면서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 젊은 시절 보따리 장사의 후유증이 나이 들면서 나타난 것이 물론 제1의 원인으로 짐작된다. 어릴 때 내가 보던 엄마는 늘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계셨다. 팔기 위한 비단이나 기성복도 있었지만 옷값으로 받은 곡식의 무게는 부피에 비해 상당히 무거웠다. 나도 가끔씩은 5일장에 곡식을 이고 가기도 했는데, 쌀 대두 닷 되든 광목 자루를 머리에 이고 30리 거리의 장에 도착하여 장바닥에 자루를 내려놓으면 어깨 속으로 파고 들어간 목이 자라목처럼 주저앉아 한 참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짐을 엄마는 365일이고 다녔으니 그 무게를 지탱할 다리가 성한 것이 기적일 것이다. 엄마가 장사를 나갔다 돌아오면 저녁에 나는 엄마 다리, 허리 위에 올라서서 온 몸을 밟는 것이 하루 일과의 마감이었다. 조금 자라서 제법 큰 손으로 엄마의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드리면 엄마는 “아이고 시원타, 숙이 손이 제법이다.”하고 칭찬을 해주셨다.
근근이 버텨오던 엄마 다리는 퇴행성 관절 진단을 받았고 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병원에서 내시경 수술을 했다. 수술 후 몇 년이 지나자 다시 통증이 오기 시작해서 몇 년 전부터는 주사를 맞고 계셨다. 통증을 완화시키는 주사라니 아마 진통제였을 것이다. 진통주사를 계속 맞으면 안 좋다고 관절 치환을 하자고 아무리 권해도 엄마는 말을 안 들으셨다. 버틸 때까지는 버티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다가 큰 아이가 대학입시를 마치고 나서야 5년 전에 드디어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한 후 엄마는 의자 없이는 앉지 못하고 가고 싶은 곳도 훨훨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서 하신 일은 바느질이었다. 동네의 작은 제품 집에서 실밥을 딴다든가 마감 질을 해서 주는 일이었고 나중에는 가죽 공장에 정식으로 취업을 하셨다. 30년 전이었는데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제법 큰 수출업체였다. 사장님이 믿을 사람이 엄마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회사 일을 내 일처럼 하곤 하셨다. 내가 결혼해서 시집으로 들어가 사는 동안 엄마는 혼자 살면서 야간 일을 자처해서 하는 바람에 건강이 나빠지셨다.
일 하는 동안 가장 안 좋아진 것이 시력이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집중해서 바느질을 하고 있으니 눈이 나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도 돋보기 끼고 그럭저럭 생활하셨는데 오래전에 눈이 너무 침침하여 안과에 진찰을 했더니 녹내장 초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당시에 마침 TV 연속극에 녹내장으로 실명이 되는 주인공이 나오는 바람에 엄마는 너무 충격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녹내장은 수술해도 치료가 안 된다고 하면서 매일매일 약을 빠지지 말고 넣으라고 주셨다. 평생을 넣어야 한다는데 가끔 잊어버리시기도 한다. 어디 여행 갈 때는 안약부터 꼭 챙기신다.
칠순을 넘은 어른들도 매우 정정하시다.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송해 씨가 1927년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91세다. 엄마는 노래자랑을 즐겨보시는데 내가 ‘엄마 송해 씨가 90이라네’하면 ‘저렇게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냐?’ 한다. 사람들이 엄마 연세를 물을 때 팔순이 안 되었다고 하면 다들 ‘아직 젊으시네! 한다. 그런데 엄마는 급격하게 늙어가고 있다. 치열하게 젊은 시절을 살고, 할머니로 세 아이를 전쟁하듯 키웠다. 엄마 몸의 상처는 나에게 아픔이다. 아침마다 밥상머리 마주 앉아 하루하루 쇠잔하는 엄마를 보는 게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