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걷다가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졌고 요양병원에 입원을 했다
추석 연휴가 끝나는 날이었다. 차례는 지내지 못했지만 배추부침개도 푸짐하게 해서 먹었고 집에는 아이들과 사촌언니가 와서 엄마는 모처럼 들떠서 보냈다. 명절에는 요양보호사가 오지 않으니 가족들이 모시고 공원에 산책도 다녀왔다. 연휴를 잘 보내고 마지막 날 엄마를 집에 남겨두고 큰딸과 마트를 갔다. 그동안 아쉬웠던 물건들을 사며 쇼핑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다.
“여보세요! 박경환 씨 따님 되십니까?”
“119 구급대입니다.”
등줄기에 화끈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확 올라왔다.
“박경환 씨께서 공원에 쓰러져 있어서 신고가 들어왔어요. 다리를 다친 것 같아 지금 응급차로 병원을 가려고 합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뭘 어찌해야 되지?
“어째야 되지요?” 내가 물었다.
“아산병원에는 지금 응급실 자리가 없어서 가까운 병원으로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예”
소방대원에게 병원 이름을 듣고 쇼핑한 카트는 그대로 팽개쳐둔 채로 병원으로 향했다. 집 근처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고관절이 부러진 상태였다. 우리가 마트 간 사이 혼자서 또 공원 산책을 간 모양이었다. 목격자가 없으니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고 산책 나온 사람에게 발견되었을 때는 보행기를 안고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의사를 면담하니 여기서 수술을 할 것인지 결정해달라고 한다. 판단이 안 섰다. 엄마가 큰 수술을 잘 견뎌낼지도 모르겠고 앓고 계신 병도 있고 해서 일단은 주치의가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문제는 종합병원에는 병실이 없고 응급실조차 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병원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마냥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처지다. 이리저리 아는 분들께 전화를 해서 겨우 주치의와 연결이 되었다. 다행히 수술 예약을 할 수 있어서 이틀을 병원에서 대기하다가 엄마 다니시던 종합병원으로 옮겨 입원을 했다.
사무실에 휴가를 내고 엄마의 수술을 지켜보았다. 엄마는 폐기능이 좋지 않아 몇 번의 재검사 끝에 겨우 수술을 했고 수술 후에도 만 하루를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병실에 옮겨서도 밤이면 섬망 증상으로 주사기를 뽑고 몸부림을 쳐서 간병인도 하루 만에 두 손 들고 도망갔다. 나는 십일이 넘게 휴가를 냈다. 아예 만사를 제치고 엄마 병수발에 집중하기로 했다. 평생을 일 타령을 하면서 엄마와 제대로 된 시간을 가지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치매환자처럼 밤마다 엉뚱한 행동을 해서 나를 당신 옆에 주저앉혔다. 엄마의 시련에 나를 동참시킴으로써 어쩌면 엄마는 평생 진 빚을 갚을 기회를 주려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종합병원에서는 일주일 이상 입원이 불가능하다.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요양병원에서는 여섯 명의 환자를 한 명의 간병인이 돌본다. 엄마는 다리를 꼼짝 못 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시는 이중고를 가지고 요양생활에 들어갔다. 병원의 진단으로는 4개월 정도 요양이 필요하다고 한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시니 나에게는 오히려 시간 여유가 주어졌다. 사무실에 출근을 했고 퇴근길에 병원에 들르는 규칙적인 날들이 지나갔다. 주말에 가서 목욕을 시키고 한나절 있어주면 끝이다. 요양병원에 가면 무기력하고 약간은 꺼져 들어가는 분위기가 싫었다. 일 년부터 길게는 몇 년씩 입원하고 계신 분들을 보면 여기를 종착역으로 여기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그래도 곧 퇴원할 사람이라는 약간의 위안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나도 엄마에게 늘 “엄마는 달라.” “엄마는 곧 나갈 거야.”라는 말을 속삭이며 강조했다. 엄마를 병원에 눕혀놓고 평온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엄마가 없는 집은 할 일이 없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일을 했다. 직장 맘들이 아이 키울 때 시골집에 계신 부모님께 아이 맡겨두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보고 싶고 걱정되지만 없는 동안 시간의 여유를 누리는 기회가 된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요양병원 입원하신 지 한 달이 좀 넘어가는 어느 날 새벽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에 익숙한 병원 이름이 떴을 때, 그것도 새벽시간에 나는 직감적으로 뭔 일인가 벌어진 것을 느꼈다. 엄마가 넘어져 다시 다리를 다친 것이다. 이번에는 대퇴골이다. 어떻게 입원을 하고 다시 수술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다. 큰 수술을 받고 한 달 만에 더 심각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도 엄마가 수술을 견뎌낼지 어떨지 자신 없어하셨다. 검사항목은 더 늘어났고 엄마는 고통 속에 대기했다. 천만다행으로 지난번 수술한 주치의 선생님의 스케줄이 간신히 잡혔다. 이번에는 아예 간병인 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사무실에 긴 휴가를 내고 보따리를 챙겨 병원으로 갔다. 24시간 오롯이 엄마만 바라보는 10일이 흘러갔다. 병원에서는 밤마다 벌떡 벌떡 일어나 주삿바늘을 빼는 엄마 양손을 침대에 묶어두도록 동의를 요청했다. 나는 차마 동의할 수 없었다. 엄마 침대 옆 라디에이터 위에 꼬부려 누워서 엄마를 내려다보며 밤을 새웠다. 엄마가 잠이 깨어 허공을 향해 손을 저으면 나는 얼른 엄마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괜찮아 나야” “자~~ 아 편안하게 자자” 그러면 엄마는 한참을 뒤척거리다 다시 잠이 드셨다. 엄마 잠이 깰까 봐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잠이 드셔서 스르르 손이 풀릴 때까지 잡고 서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게 씨름을 하다 보면 드디어 등 뒤에서 창문이 희붐하게 밝아왔다. 낮에는 남편이 잠깐 와서 엄마를 봐줬다. 나는 보조 침대에 누워 한두 시간 꿀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또 저녁이 오고 그러면서 하루가 갔다.
엄마는 치료병원을 퇴원해서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사무실에서 30분 이내에 있는 시설 좋은 병원을 찾았다. 간병인도 엄마를 24시간 볼 수 있는 개인 간병인으로 구했다. 엄마는 그 병원에서 겨울을 나고 6개월을 지낸 후 벚꽃 피는 화창한 봄날에 퇴원을 했다. 고관절은 인공뼈를 넣었고 대퇴골에는 철심을 박았다. 오래전에 박은 무릎의 인공관절까지 하면 두 다리는 인공의 힘으로 엄마를 지탱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파킨슨병으로 다리는 조금씩 마비되어 움직이기 어렵게 되니 이제 더 호전되는 희망은 없다. 오직 조금이라도 더 늦게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환영하며 축하했다. 엄마에게도 새로운 인생의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인생은 누구나 견뎌낼 만큼의 시련이 주어진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고통의 시련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