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자고 걷는 것만으로도 사는 의미가 있어

'이렇게 사는 게 뭔 의미가 있어?'라고 묻지만 인생은 그렇다

by 안경숙

약속이 있어 늦는 날에 엄마 당번은 막내가 맡는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막내는 할머니를 잘 돌본다. 그래서 그 녀석에게 엄마를 맡기면 안심이 된다. 엄마가 정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내가 화가 나서 거칠게 대하면 엄마는 '막내 언제 오냐?'라고 물어서 나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다. 나는 매몰차게도 '엄마 지금처럼 하면 막내도 싫어해!'라고 내뱉어 버린다. 그러면 엄마는 금세 풀이 죽는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한사코 거부하다가도 '막내한테 보낼 거야'라고 하면 '브이'까지 하며 순순히 협조한다. 막내를 믿고 밤 10시가 넘도록 있다가 귀가를 했더니 엄마는 주무시고 계셨다.


피곤해서 그대로 쓰러져 잤는데 밤새 두세 번 하던 호출이 없다. 뭔가 탁탁 소리가 나서 깨어보니 희붐하게 날이 밝아 오고 있다. 웬일이지? 막내가 도와드렸나? 하면서 일어나 방으로 갔는데 엄마가 침대에 없다. 화장실을 들여다보니 세면대에 바지를 넣고 주무럭 주물럭 빨고 계신다. 웬일이지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말은 않고 하던 동작을 계속하신다. 짐작컨대 볼일 보시다가 바지를 버리신 모양이다. 나를 깨우면 잔소리 들을까 걱정되신 걸까? 또 반성을 시키신다. 평소보다 온화한 목소리로 옷을 갈아입히고 자리에 눕혔다. 속상한 얼굴이다.


엄마가 언젠가 우울해하면서 '너하고 나하고 죽자'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짐짓 농담처럼 '싫어. 죽긴 왜 죽어? 아직 하고 싶은 일이 태산인데!'라면서 밝게 웃었다. '엄마 지금처럼만 살면 돼. 너무 앞날은 걱정 말고. 또 닥치면 그때 생각하면 되잖아! 엄마 젊었을 때 장사하면서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지금은 나도 있고, 그냥 열심히 운동하고 움직이면 돼.'라고 했더니 조그만 소리로 '지금이 더 힘들어'라고 하셨다.

자기 손으로 밥 먹고 옷 갈아입고 걷는 것이 안 될 때 스스로 '이렇게 사는 게 뭔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산다는 것도 별 것 아니다. 먹고, 입고, 걷고 하려고 매일 출근해 돈을 벌고, 돈을 벌려고 궁리하고 서비스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돈 안 쓰고 사는 거와 열심히 일하고 하루 종일 애써서 돈 벌어 그저 쓰기 위해사는 것이 다를 게 없다. 엄마는 젊어 결혼해 자식을 낳았고 손주 셋을 성인으로 키웠고 당신 먹고살 만큼 돈도 벌었다. 지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사셔도 될 만큼 치열하게 산 기간이 길기 때문에 일생을 평균한다면 상위 10% 정도로 잘 살아낸 분이다. 이런 걸 엄마가 아셨으면 좋겠다. 이제 어린아이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걷고 한 번의 외출을 위해 전신의 에너지를 쏟는 그 행위 자체에 삶의 의미가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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