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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Jun 06. 2019

엄마의 독립

은퇴준비를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대로 배운적도 없으니 남들 읽기에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을 쓸 능력은 없다. 그래도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이 힐링이 되고 남은 삶에 대한 희망과 의욕이 솟는 효과는 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글을 쓰세요!'라고 권하고 다닌다. 가장 쉽게 쓸 수 있는 글이 자기자신에 대한 것일 터이니 일상의 글을 쓰고 그 글들이 모이면 내 인생의 자서전이 되지 않겠는가? 엄마와 함께 하며 엄마의 자서전을 써 드리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의식이 있을 때 '엄마 참 잘 살았고 고마웠어'라며 엄마 책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

돌도 되지 않은 갓난아이를 남겨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스무살의 엄마는 너무나 막막했다. 연애를 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으니 절절한 애정으로 그리하였다기 보다는 그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의지처가 허물어졌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부모 복 없는 팔자가 남편 복이 있을리 만무하다'는 말로 표현을 했다. 더군다나 바느질 솜씨 좋다고 이뻐해 주시던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나자 정말 이제 구박덩어리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형편이 어려워 문중 제궁집에 살던 할아버지이하 대식구는 나물죽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으니 외로운 운명의 수레바퀴에 딸과 함께 깔려서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


엄마는 살아야 겠다고 독하게 맘을 먹었다. 그리고는 보리쌀 한 되, 좁쌀 한 되 수저 두벌을 챙겨서 분가를 했다. 가재도구라고는 아버지가 손수 짜셨던 궤짝하나가 전부였다. 큰 집이 있던 외딴 제궁에서 벗어나 남녘동네로 이사를 했다. 남의 집 사랑방을 빌려 갓난쟁이와 둘이 살기 시작했다. 가진 농토도 없으니 엄마가 할 일은 동네 남의 집 논, 밭 일을 해주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일하면 설마 두 식구 입은 못 먹고 살겠나 하는 단단한 각오로 아이를 들쳐업고 들로 나갔다. 일하는 동안 아이는 밭어귀 나무밑에 앉혀놓았다. 그러나 두 발 달린 짐승이 어디는 못가겠는가? 사방으로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다 논구덩이에 빠져서 울기 일쑤였다. 엄마는 아이의 허리에 칡덩굴로 줄을 묶어 길게 늘어뜨린 뒤 나무에 동여맸다. 아이는 나무주위를 줄이 닿는데 까지 뱅글뱅글 돌면서 놀다가 배가 고프면 흙을 집어먹고 꼬물거리는 벌레도 집어먹었다. 그러다 지치면 나무그늘 아래 누워서 잠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살았다면 엄마는 평생을 남의 집 땅을 부치면서 평범한 시골아낙으로 일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어쩌면 좋은 남자를 만나 재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시골마을에서도 그때는 이미 평생수절이니 열녀효부니 하는 말이 없어져가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은 엄마에게 개가를 권하였다. 아이 하나 딸린 것 정도는 큰 흠도 아니었다. 어릴 때 어른들은 가끔 내게 물었다. “숙이는 엄마 재혼하면 따라 갈거냐?” 그럴 때마다 나는 아주 옹골차게 대답하곤 했단다. “싫어요, 내가 왜 남의 집에 따라가요? 나는 영주 성냥공장 다녀서 돈 벌거예요.” 어른들은 그런 내가 재미있어 장난삼아 그런 질문을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 대답은 영주 성냥공장에서 누에 꼬치공장, 그리고 부산 고무신공장까지 진로를 바꾸어 대답하곤 했단다. 엄마는 동네사람들 말을 흰 소리로 귀 넘어 듣고 대꾸도 안했다고 한다.


당시에 엄마의 외삼촌이 영주읍내에서 어물전을 했었다고 한다. 꽤 규모가 컸었고 장사도 잘되어 종업원을 몇 명씩 두고 운영을 하였다. 외삼촌은 혼자된 엄마에게 장사를 권했다. 그러면서 돈 삼만원을 조건없이 꿔 주었다. 엄마는 겁이 없는 편이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집안을 꾸려온 경험이 있어서이기도 했을 터이고 또 원래 타고난 기질이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엄마는 당신의 엄마를 닮았다고 했다. 엄마는 외삼촌에게 받은 돈으로 대구에 가서 옷을 도매로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동네에 와서 보따리를 이고 다니면서 이문을 조금씩 붙여서 소매로 팔았다.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하루종일 이고 다녀도 한 벌도 못 파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엄마는 나를 집에 남겨두고 장사를 나갔다. 하루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보따리를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다보니 점점 안면이 트이고 조금씩 옷이 팔리기 시작했다. 생선장수처럼 생물이 아니라 썩어버리는 것도 없고 안 팔리면 다음날 또 이고 나가면 되니까 이문은 좀 박하더라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장사라고 생각해서 엄마는 비단장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장사를 해서 조금씩 저축을 하다가 돈이 어느정도 모이면 엄마는 논을 한마지기씩이라도 사들이셨다. 그 즈음에 시골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엄마도 농토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다. 논, 밭을 사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지만 남을 줘서라도 농토를 소유하고 싶던 그 마음은 그때까지 집도 절도 없던 엄마에게 한가닥 그 땅에 발붙이고 사는 징표였는지도 모른다. 서울 올라오면서 논을 파셨지만 아쉬운 맘에 아버지 산소근처 약간의 논은 오래도록 못 팔고 남겨두었다. 그 당시 팔아서 가져왔으면 지금쯤 대단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그 작은 역사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해마다 그 논을 보러갔고 거기서 난 쌀로 밥도 먹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저런 대소사를 챙길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논은 다 팔게 되었다. 외로운 아버지 산소만 덩그러니 남았다. 거동이 어려우시니 엄마는 이제 산소 나들이도 못한다.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 엄마는 딸 하나 있는 걸 어떻게든 잘 키우고 싶어했다. 읍내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나를 서울 사는 종 이모에게 부탁해서 서울로 전학을 시켰다. 그러나 결국 엄마 뜻대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래도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처럼 고만고만하게 사니 엄마와 이런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물론 더 잘 살았다면 엄마말대로 아주 호강시켜 드렸을지 모르니 잘난척은 이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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