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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Jun 05. 2019

꼭 안아주진 않았지만 나는 엄마 사랑을 느껴

센터에서 저녁에 돌아오는 엄마는 늘 발이 조금 부어있다. 아마도 하루종일 소파나 의자에 앉아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 잠깐씩 낮잠 자는 시간이 있기는 한데 엄마는 대낮에 잘 누워계시지 않는다. 원장님 말씀으로도 엄마가 낮잠을 안 잔다고 한다. 잠들었다가도 10분도 안되서 깨서 일어나 앉는다고. 평소에 엄마의 지론이 '대낮에 자빠져 자는 사람치고 잘 사는 사람 못 봤다.'이다. 저녁에 와서 겨우 침대에 누우면 다리와 발을 주물러 드린다. 어떤 날은 자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10여년 전에 양쪽 무릎을 인공관절로 바꾸셨고 왼쪽 다리는 고관절도 인공관절이다. 왼쪽 대퇴골에도 골절로 인해 철심이 박혀있다, 혈액순환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러면서도 또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일테니 다리가 아플 수 밖에.

어린시절 엄마는 보따리 장사를 나갔다가 늘 늦게 집에 들어오시곤 했다. 저녁상을 치우고 나면 엄마는 고단한 몸을 자리에 누이고 나에게 다리를 밟거나 어깨를 주무르도록 했다. 조그만 손으로 잘 쥐어지지 않는 어깨를 주무르고 있으면 엄마는 “아이구, 시원~하다.”하시며 나를 칭찬했고 칭찬에 중독된 나는 귀찮았지만 엎드린 엄마의 허리위에 올라가 조그만 발로 엄마의 허리와 엉덩이 다리를 차례로 밟아 드렸다. 밟다가 꿀렁꿀렁한 엉덩이 때문에 밑으로 떨어지면 벽을 짚고 다시 밟고는 했다. 한참 밟고 주무르고 나면 엄마는 피로가 풀리시는지 잠이 들고는 했다. 나도 엄마 옆에 바짝 누워서 엄마등에 손을 얹고 잠이 들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엄마와 떨어져 읍내에서 자취할 때 나는 다른 집 아이들과 다르게 매주 마다 집에 가지는 않았다. 집에 가지 않는 주에는 자취방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읍내를 그냥 마냥 돌아다녔다. 서울에 올라와서 방학때 시골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와 나는 서로 그리워했지만 막상 만나서는 그저 그렇게 지냈다. 저녁에 잘 때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누워있다가도 늘 혼자 자던 습관 때문이었는지 이내 숨막혀 하면서 돌아누워 자거나 팔베개를 풀고 조금은 떨어서 서로 편안한 자세로 잠이 들곤 했다.


어린 시절의 신체접촉이 아이들 정서에 좋고 부모와의 유대가 강화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엄마와 신체접촉을 통한 유대를 크게 강화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도 남들이 흔히 추억하듯이 엄마 젖가슴을 만지면서 잠들지도 않았고 크면서도 엄마가 나를 꼭 끌어안아 준 기억이 별로 없다. 엄마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다지 엄마 품을 파고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세상에 가족이라고는 엄마와 나 뿐이었는데도 우리는 그렇게 덤덤하게 살았다. 후에 내가 커서 엄마를 짓궂게 안거나 하면 엄마는 ‘징그럽게 왜 이랬쌓노?“ 하며 팔을 풀곤 했다. 매사에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해주면서도 신체적으로 그러한 애정을 표현한 적이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둘의 사이에 끈적끈적한 정이라든가 애살스러움은 적을지 몰라도 한 인격적인 존재로서 엄마에 대한 존경, 그리고 주어진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낸 한 여인에 대한 예의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내가 매일 엄마와 싸우면서도 엄마를 내 맘속에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는 이유이다.

요즘도 엄마는 내가 얼굴을 쓰다듬거나 살짝 안아주면 곧 팔을 뻗어 밀어내곤 한다. 엄마와 달리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팔을 살짝 건드리거나 어깨에 손을 얹곤 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꼭 안아주고 등을 토닥거리게 된다. 엄마에게 못 받은 신체접촉에 대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꼭 안아주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내게 희생이 뭔지 가르쳐줬고 은근한 배려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일생을 통해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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