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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Jun 09. 2019

딸은 힐링하고 엄마는 기다리고

"엄마 MT간다." 막내에게만 살짝 말했다. 여느날 출근하는 것과 같이 전날 준비를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기 때문이다. 모자를 이것저것 꺼내 써 보며 막내에게 봐 달라고 했기 때문에 눈치 빠른 엄마는 벌써 짐작을 했으리라.

그 전날도 독서토론을 한다고 대여섯 시간을 나갔다 왔다. "또 외출이냐?" 하신다. "그럼 뭐 일년 365일 엄마만 쳐다보고 있어? 나도 살아야지." 그러나 차마 이런 말은 겉으로 내뱉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하루 12시간 남의 손에 엄마를 내맡긴 사람의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 내 입장에서야 회사일 이외의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에게 준다고 생각하니 주말의 내 시간이 중요하다. 그러나 엄마 입장에서 보면 일주일 내내 남들과 지내다가 단 이틀 집에 있는데 제대로 안 해주고 또 기어나가나 싶을 터다.

어쨌든 이기주의자 딸은 자기 할 건 다 한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글쓰기 회원들과 국민연금에서 하는 '영월통신사' MT를 갔다. 아침 6시반전에는 나와야하니 5시부터 허둥댄다. 된장찌게와 김치찌게를 해놓고 막내에게 취향대로 할머니도 드리고 함께 먹으라고 시키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부리나케 준비해서 튀어나온다. 가까스로 버스 출발시간에 맞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눈앞에 엄마가 사라지니 갑자기 힐링모드로 전등이 반짝하고 켜졌다. 나누어준 김밥도 먹고 경치도 감상하면서 곁에 앉은 회원들과 수다 삼매에 빠졌다.

영월의 숨은 비경 외씨버선길을 걸었다. 아픈 다리로 걷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 예밀리 마을 회관에서는 곰취 쌈에 훈제 돼지고기, 임금님께 진상되었다는 어수리, 참비름, 콩나물, 엄나무순으로 차려진 점심을 맛나게 먹었다. 농촌 살리기 새로운 경제로 그 지역 특산품도 경험했다. 바로 '예밀와인'의 와이너리 방문이다. 와인 해설에 귀 기울이면서도 내 몸의 세포는 와인족욕과 와인 마시기로 흐물흐물 녹아 내렸다.

그동안 딱딱하게 긴장해 있던 몸과 마음이 음식, 공기, 풍경,사람들로 인해 부드럽고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간의 취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상은 필터를 끼운 필름처럼 낭만적이었다. 잠깐의 힐링은 척추 뼈 사이의 연골과 같다. 일상의 긴장으로 딱딱해진 등뼈는 이 작은 탈출에서 얻은 흐물흐물한 연골로 뼈 마디마디가 끊어지지않고 이어지며, 삶의 충격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앞뒤로 유연하게 휘어진다.


사는 게 그렇다. 오늘 힘들어 죽을 것 같지만 지나가는 사람의 가벼운 토닥임으로 또 힘차게 일어선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그 따뜻함은 내 손에서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기쁨으로 전달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와인 두 병을 샀다. 충동구매에 휘둘렸을 수도 있지만 이 하루 나를 부드럽게 취하게 해준 그 붉은 액체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었다. 이 와인을 이제 누구와 함께 마시며 내 기쁨을 전해줄까? 행복한 상상을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무거운 와인병을 들고 낑낑대며 집에 오니 막내가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는지! 저녁 알바 수고를 폭풍 칭찬해주고 엄마를 만났다. 문여는 소리에 잠이 안 깼을리 없지만 짐짓 눈을 감고 있다. 방에 들어가 일으켜 앉힌다. 밤 11시가 다 되었지만 시원한 참외 하나를  깎아드리니 눈을 감고 드신다. 샤워를 하고 나올  때까지 그대로 식탁에 앉아 계신다.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피곤하다. 방에 모셔다 눕히고 토닥토닥 이불을 덮어드렸다. 아무말 않으시고 그대로 주무신다.

"엄마 잘 자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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