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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eun Apr 22. 2019

14 유스호스텔에서 다섯 밤, 라인강을 바라보며 두 밤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바젤 여행기

여행지의 숙소에서 당신은 어떤 타입의 사람인가. 방문자로서의 자각을 잃지 않고 캐리어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걸 꺼내 쓰는 타입? 혹은 옷을 모두 꺼내서 옷걸이에 건 다음, 미리 챙겨 온 링클프리 제품을 뿌리고, 가져온 책이나 노트를 꺼내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는 것으로 일상의 조각을 옮겨오는 타입? 우리의 여행에서 K는 전자, 나는 후자였다. 이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것은 여행 후반부, 크래프트 바젤로 호텔을 옮긴 뒤였는데, 바젤 유스호스텔의 더블룸에는 옷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옷장의 부재를 아쉬워한 건 나뿐이었다.


바젤 유스호스텔
Jugendherberge Basel


우리가 묵은 323호의 사인 / 옷장 대신 옷걸이 두 개 / 베개 위에 살포시 놓여있던 웰컴 캔디, 리콜라


유스호스텔 Youth Hostel은 말 그대로 청년들에게 최적화된 숙소다.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고, 비슷한 또래의 여행자들이 모여 활기가 넘치고, 국적과 성별에 관계없이 한 방을 쓰면서 '글로벌 맛보기' 정도의 교류도 가능하다. 그래서 프라이버시를 온전히 보장받기를 원하거나 굳이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청년기로부터 한 발자국씩 멀어지고 있는 나 같은 여행자들을 '유스호스텔'이라는 이름만으로 걸러낼 수 있다. 하지만 바젤 유스호스텔은 벽돌로 만들어진 진짜 아치와 프리츠 한센 Fritz Hansen의 그랑프리 체어가 어우러지는 너무 멋진 식당을 가진 탓에, 방에 옷장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손님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하지만 다섯 번의 밤을 보내면서 불편함은 익숙해지고, 모든 게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식당으로 갔다. 사진으로 보았던 진짜 아치 아래, 그랑프리 체어에 앉아 아침식사를 했다. 메뉴는 단출했지만 몇 번의 모험 끝에 최선의 조합을 찾아냈다. 바삭하게 구운 따끈한 식빵에 스위스산 버터와 크랜베리 잼을 바르고 스위스산 치즈와 햄을 올려 먹는 것이었다. 에스프레소 자판기의 카푸치노도 곁들여서.


바젤 유스호스텔에서의 소박한 조식


식사를 마치면 커다란 나무 문을 열고, 나무다리를 건너 길을 나섰다. 다리 밑으로는 깨끗한 개울물이 경쾌하게 흘렀다. 우리는 주로 라인강변을 따라 걸어 트램을 타러 갔다. 매우 빠른 물살에도 평화롭게 둥실둥실 떠있는 오리들과 강 건너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때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바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단 나가면 실컷 돌아다니다가, 해가 진 뒤에는 마을길을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쿤스트 뮤지엄 뒤쪽으로 이어지는, 귀여운 상점들과 만화박물관이 있는 거리는 비가 오거나 맑거나 늘 운치가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면 창밖으로 시내에 우뚝 솟은 로슈 La Roche 본사가 보였다. 이 건물은 동이 틀 때나 노을이 질 때가 가장 멋있었지만, 해가 진 뒤 조명이 켜져 있는 모습도 좋았다. 야근을 하시는군요, 전 휴간데. 그러니 옷장 따위 없으면 좀 어떤가. 벽에 훅이 있으니 옷을 겹쳐서 걸어두면 된다. 나는 여행을 갈 때 철사 옷걸이를 챙겨 다니는 타입이니까.


바젤 유스호스텔에 묵기 전, 우리가 궁금했던 것들

· 수건: 배스타월 2장과 발수건이 준비되어 있다. 바닥에 두면(갈아달라는 신호) 매일 갈아준다.
· 어메니티: 비누는 없지만 샤워 칸에 도브 올인원 워시가 있다.
· 헤어드라이어: 리셉션에 보증금을 내고 빌릴 수 있다. 성능은 시원치 않다.
· 미니바: 없다. 대신 1층에 간단한 스낵바가 있다. 마트에서 사 온 맥주는 발코니에 내어 보관했다.
· 침대: 싱글 침대를 두 개 붙인 구성. 침구는 꽃무늬는 아니지만 딱 호스텔 풍.



크래프트 바젤
Krafft Basel


아날로그 객실키와 건물 외관 사진이 담긴 홀더 / 그래픽 모티프로도 사용된 호텔 바닥의 타일 / 'KRAFFT BASEL', 'NOMAD', 'CONSUM' 성냥갑


캐리어를 끌고 유스호스텔을 떠나 트램을 타고 라인강을 건넜다. 크래프트 바젤이 있는 강북 쪽은 조금 더 복작거리고 젊은 분위기였다. 체크인을 한 뒤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층마다 마련된 라운지에는 데스크에 랩탑과 프린터가 있고, 책장을 겸한 작은 바에서 탄산수와 탭 워터, 차, 간단한 스낵과 과일이 제공되고 있었다.


열쇠로 402호의 방문을 열자, 널찍한 공간이 나타나면서 창밖으로 라인강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래, 이거지.' K와 나는 창문을 연 다음 소파를 나란히 두고 앉아 라인강을 보면서 캔맥주를 마셨다. 리버뷰에서 2박을 하는 비용은 바젤 유스호스텔에서의 5박 요금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이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지불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옷장도 있었고.)


크래프트 바젤의 1층에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있다.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깨끗하고 밝은 공간에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걸려있다. 스테인리스가 아닌 은식기를 쓰고, 테이블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려있는 전통적인 스타일이다. 라인강이 보이는 창가 자리는 예약이 필수라고 한다. 이 레스토랑의 한가운데에 투숙객의 아침식사가 차려지는 것이다. 조금 이른 아침, 정갈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스웻셔츠를 입은 채, 잠이 덜 깬 얼굴로 창가에 앉아, 파랗게 밝아오는 라인강의 풍경을 보며 아침을 먹었다.


로비라운지에서 이어지는 식당 출입구 / 먹음직스러운 빵이 한가득 / 패키지가 예쁘고 맛도 좋았던 바젤산 홈메이드 요거트 MYLK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K의 친구를 함께 만나러 취리히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바젤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마치 교외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이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 방문객일 뿐.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방을 다시 나서, 호텔 주변의 바를 몇 군데 돌아봤다. 가게마다 노란 불빛과 왁자지껄한 소리가 거리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용한 줄만 알았던 도시에서도 토요일 밤은 역시 특별한 듯, 차가운 공기에 흥겨운 분위기가 섞여 흘렀다. 이번에도 그냥, 보기에 좋은 곳을 골라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벌써 마음에 들어버린 바의 이름은 '컨숨 Consum'. 크래프트 호텔 리셉션에 놓인 성냥갑에서 보았던 이름이다. 이 곳이 크래프트 바젤의 바라고 했다. 호텔은 길 건너에 있는데요? 알고보니,'크래프트 그룹 Krafft Gruppe'에서 크래프트 바젤과 길 건너에  '호텔 컨숨 레지던스 Hotel Consum Residence by Krafft Basel'를 운영하는 것으로, 우리가 들어간 바 위로 12개의 객실이 있는 거였다. 크래프트 바젤과 컨숨은 바 뿐만 아니라 체크인 데스크도 같이 쓴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몇 번이나 언급된 '노마드 호텔'도 크래프트 그룹의 브랜드이고, 바젤에서 마셨던 수제 맥주 '볼타 브루 Volta Bräu'도 같은 회사의 브랜드였다. 다들 비슷한 수준으로 디자인이 정돈되어 있더라니.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우리를 끌어들인 CONSUM 외관


Consum을 고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운 마음이 어떤 작용을 일으킨 건지, 술도 음식도 다 맛있었다. 감자에 곁들여 나온 쳐트니는 입맛에 딱이라 결국 레시피까지 물어봤다(맛의 비결은 자두). 직원들도 하나같이 밝고 친절했다. 우리는 특히 Leonie라는 이름의, 키가 크고 헤어와 미소가 멋진 직원에게 반했다. 어쩐지 Corinne Bailey Rae가 생각난다고 얘기하던 중에 그녀의 노래가 나왔다. <Put Your Records On>. K와 나는 이 노래를 이번 여행의 테마송으로 삼기로 했다.


기분이 한껏 올랐다. 밖으로 나가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강 가까이 내려가 손을 담가보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오니, 창 밖으로는 강물이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한 밤이었다. 다음 날 떠나야 한다는 사실만 빼고.


방에서 보이는 라인강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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