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시작하며
오후 5시, 퇴근할 시간이다.
야근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일해준 나에게 감사하며,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건물 밖을 나서는데 날씨가 꽤 따뜻해진 것 같다. 오랜만에 따릉이를 빌려 탄다. 페달을 천천히 밟으면 땀도 나지 않을 텐데, 굳이 최고 속력을 내며 달려본다. 바람이 얼굴을 빠르게 스쳐가는 느낌이 좋다. 작은 천변을 따라 집을 향해 달리면서 앙상한 풍경이 계절에 따라 바뀌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유튜브를 틀어두고 간단한 저녁을 먹은 다음, 집안일을 조금 하다가 수영장에 간다. 몇 개월째 접영 자세가 잡히지 않아 선생님도 나도 답답하지만, 언젠가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은 채로 느슨한 실력 향상을 추구하고 있다.
집에 돌아와 잠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밤이 깊어갈수록 썰렁한 기운에 발 끝이 조금 찬 것 같다. 보일러 온도를 올리려던 손이, 지난달 가스비 고지서가 떠올라 멈칫한다. 어쩔 수 없지. 몸을 조금 데워보려고 이불 안으로 꼼지락 들어갔을 뿐인데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잠이 든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 건 삶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더 큰 프로젝트를 해야 해. 더 인정받는 자리에 가야 해. 더 많은 활동을 해야 해.' 고민거리를 굳이 들춰서 해결하려고 애쓰고, 스스로도 뭔지 모를 목표 자체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마음가짐이 달라진 후였다. '단조로운 게 아니라 안정적인 거야.' 어쩌면 나태함을 포장하는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너무 빡빡했던 걸지도 몰라, 조금 헐렁해져 보기로 했다. 그런데 새로운 마음으로 요즘의 일상을 들여다보니 이렇게 좋은 시절이 또 없다. 어느 친구의 말처럼, 유러피안 라이프 같은 면도 있고.(물론 그 친구도 나도 유럽에서 안 살아봤지만)
성실하게 만들어 온 안정적인 일상 위에 소소한 만족감을 쌓아가는 날들. 이런 매일이 모여 언젠가 폭발적인 에너지를 낼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대로 잔잔하게 흘러가도 더할 나위 없겠다. 하지만 마음은 변덕스러워서 언제 또 복잡해져 스스로를 괴롭힐지 모르니, 그때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나를 기록해두고 싶다.
다른 이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도, 대단한 인사이트도 없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기록을 여기에 남겨보려고 한다.
(photo: Annie Spra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