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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 May 23. 2021

<여자와 군대> ep.07

내가 학군단에 합격한 해는, 성신여대에 학군단이 창설된 해이자, 전국적으로 여자 후보생을 모집한 첫 번째 해였다.

여자에게 열지 않았던 문을 최초로 완전히 개방한 해이기 때문에 큰 이슈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체력 측정하는 모습, 그룹 면접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방송국에서 취재를 왔고 뉴스나 인터넷 기사로 뜨는 모습을 봐왔다.

취재를 왔을 때는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건가 싶어 들뜨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방송과 기사가 나가자, 인터넷은 악플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사병은 못하겠고 간부는 할 수 있냐?
여군들은 가면 아무것도 안 하고 꿀 빤다.
전쟁 나면 싸울 수 있기는 하냐?
체력 합격 기준 똑같이 해라.
남자들도 풀 데가 있어야지. 가서 위안부 하다 와라.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정말 많이 상처 받았다.


남자들도 사병으로 갈 때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도에 의해 끌려가는 거고, 안 갈 수만 있다면 없던 병도 만들어내고 멀쩡한 이도 뽑는 마당인데.

여자들이 거부해서 징병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제도가 없었을 뿐인 건데. 만약 제도가 있었다면 지금 대다수의 남자들이 가듯이 당연히 가지 않았을까.

내가 군대를 갈게 아니라 여성 징병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애걸복걸했었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여군들이 자기 목숨 깎아먹는 줄도 모르고 더 죽어라고 하는 꼴을 봤으면 더 봤지, 노는 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입덧으로 토하면서도 업무를 끝내야 했기에 밤늦게까지 일하던 건 나였고, 오전 시간에 토하느라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꼴을 비난하던 사람은 5시 반 땡 치자 마자 퇴근하던 남군이었다.


여군들의 체력 합격기준이 남군들의 그것보다 떨어지는 건 맞다. 맞는데,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여군들은 자신들의 합격기준을 자존심 상해했고, 남군들의 합격기준에 맞추려고 했다. 그 결과 처음 입소했던 훈련에서 많은 친구들이 남군들의 합격기준에 도달했고, 체대 출신인 여자 동기들은 남군들의 특급 기준에 맞춰 자신들의 체력을 측정했다. 심지어는 윗몸일으키기의 남군 특급 기준이 2분에 80개 언저리였었는데, 100개를 넘긴 친구들도 있었다. 그만큼 자신들도 그 기준에 수긍하지 못했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여군들의 능력이 열등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위안부? 단지 키보드워리어 중 한 명이라고 취급하기에는 실제로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안다.

군대 동기랑 결혼한다는 경사를 알리는 남편의 앞에서,


“여군은 진급하려면 성접대 같은 거 해야 된다며?”


라는 말을 던지는 형이 있었다고 했다. 화를 참지 못해 주먹이 나가는 남편을 주위의 친구 몇 명이 죽어라 뜯어말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저런 악플과 시선들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숙명여대 학군단과 성신여대 학군단이 1등을 했다는 기사에도, 군인부부를 소개하는 글에도, 머리카락을 잘라 기증한 여군의 기사에도,

여군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곳은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같은 내용의 악플들이 정말 열심히도 달렸다.

우리는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또 남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이 악물고 했는데 저런 저급한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맥이 빠지고는 했다.


우리를 그렇게 쥐 잡듯 잡았던 정 모 훈육관님도, 임신 중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신 오 모 대위님도,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며 누구보다 부대에서 열심히 일하시다가 암으로 돌아가신 박 모 대위님도, 이미 특급 판정이 나도 윗몸일으키기와 프쉬업을 멈추지 않고 카운팅을 하던 동기들도 저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나는 진심으로 여성 징병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휴전상태인 우리나라에서 사는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군대를 알아야 하고,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총 한 자루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전쟁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성별에 관계없이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전쟁을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 징병이 꼭 이루어져서 국가에 대한 사명감으로 청춘을 바치고 가정의 안락함을 내려놓은 여군들의 의지가 모욕당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오후 6시, 애국가가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하면

그날의 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멈춰 선다.

그리고는 태극기가 있는 방향을 향해 말없이 거수경례를 하고 선다.


길 가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해지는 노을을 마주하고 경례를 하는 진풍경을 볼 때면, 내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되고


그 날 하루의 힘들었던 노곤함이 나를 향한 격려와 뿌듯함으로 다가온다.


무거운 군장과 총을 메고 있을 때도

얼굴에 새까만 위장을 칠하고 있을 때도

온몸이 비에 젖어 파김치가 되어있을 때도

빨간 노을을 뒤로한 채 펄럭거리는 태극기와 울리는 애국가는

항상 내 마음을 뜨겁게 했다.


내가 군에 오래 몸 담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인생에 이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내 가슴의 영원한 훈장이 될 것 같다.


-2014년 OBC(초등군사교육반) 기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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