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생긴다면

천선란의 『이끼숲』과 함께 바라본, 복제인간과 자아의 경계에 대해

by 알레로그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본다.

하루가 너무 짧다고 느껴질 때, 업무와 의무에 치여 숨이 턱 막힐 때. 출근길에 발걸음이 무거울 때.

“나랑 똑같은 복제인간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그 복제인간이 대신 해주고, 나는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복제인간이 정말 나와 ‘완전히’ 똑같다면,

그도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똑같이 싫어하지 않을까?


그도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어하고, 과중한 업무에 지치고, 내가 일을 미루듯 일을 미루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와 똑같은 나’에게 시키는 일이라면, 내가 명령하는 쪽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선란의 소설 『이끼숲』 에서도 클론이라는 소재가 나온다.

사고를 예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후 대책으로써의 클론.

사전 점검을 철처하게 하고 사고의 가능성이 줄어들었을 때 사람을 투입해야 하는 일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 사람을 먼저 갈아 넣고 사고가 발생하면 준비해 둔 클론을 이용해 부품을 갈아끼우듯 신체 이식을 하는 것이다. 아마 클론의 자아 문제와 윤리적 문제를 회피하고자 지하도시에서는 신체의 일부를 교체할 수 있는 여분의 신체 역할로만 다루어졌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정말로 클론이 만들어진다면, 인간이 어떤 규칙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마주하게 될 클론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소설에서는 사고로 잃은 신체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하기 싫은 일을 대신하도록 클론에 자율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런 자율성이 생긴 클론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 나를 완벽하게 복제한 존재와 나 사이의 차이는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똑같은 외모, 목소리, 말투, 감정, 심지어 기억까지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구분할 수 있을까?

‘다르다’고 말하는 순간, 그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둘째, 내 감정과 기억, 선택까지 복제되었다면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걸까?

‘기억’이 곧 ‘자아’를 정의한다면, 기억이 복제된 순간 자아도 복제되는 걸까? 내 자아는 정말 ‘생물학’적인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는 걸까?

셋째, ‘원본’은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할까?

나는 내가 원본이라는 자격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까?

원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하더라도, 원본이 우위에 있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니 복제에 대한 상상은 기술의 영역을 넘어 ‘나’라는 존재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단지 유전적, 생물학적 정보로 구성된 존재일까?

아니면 타인과의 관계, 기억, 선택, 그리고 책임을 통해 조금씩 쌓아 올린 자아의 결합체일까?


이상적으로 클론을 활용하려면, 내 일부를 떼어내어 외부에 존재하도록 해야 할 것 같다는게 내 결론이었다.

좋든 싫든, 내가 해야 하는/하고 싶은 일 일부를 떼어내 위임하는 것이다. 아마 나와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면 우리는 원만하게 합의를 진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외부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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