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는 것만으로도 채워지는 재밌는 '지적 충족감'
1. 책상 위의 작은 탑
지난해 책을 62권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적은 숫자일 수 있지만 제게는 인생 최대 기록이라 기억해두고 있습니다. 근데도 제 책상 한쪽에는 아직 펼치지 못한 책들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읽어야지 하고 사온 책들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위에 또 다른 책이 더해지며 하나의 '탑'이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읽겠지하며 쌓은 책들이지만 제 마음에는 오히려 묘한 안정을 줍니다. 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배운 거 같다, 뭔가 아는 거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가끔은 그 쌓여 있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책이 높아질수록 미뤄둔 시간에 대한 부담도 커지지만 동시에 묘한 지적인 충족감을 가져다줍니다. 종이 뭉치의 무게를 넘어, 마음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작은 버팀목 같달까요.
2. 서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발걸음
책을 쌓아두는 습관은 서점에서 시작됩니다.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종이 냄새와 잔잔한 음악,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등들이 주는 기운에 발걸음이 멈춥니다. 표지의 색감이나 제목만으로도 읽고 싶어지고 뒷표지에 적힌 짧은 문장 하나에 읽어야만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계산대에 책을 올려놓을 때는 오늘 밤 당장 첫 장을 펼쳐보리라 다짐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하루의 피로가 몸을 눌러 책을 열지 못하게 만들고, 책은 그대로 쌓여 또 하나의 층을 만듭니다. 그럼에도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느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책을 사는 행위 자체가 이미 독서의 일부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책을 들고 나오는 순간 이미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왔다는 기분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3. 읽지 못하고 탑을 쌓는 이유
읽지 못하는 이유는 꼭 시간이 없어서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집에 이미 있는 책보다 새로 나온 책이 더 내 삶에 알맞고 재미있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서점에서 막 집어 든 책에 마음을 뺐기면 이전에 사두었던 책들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다 보면 예전에 왜 그 책을 골랐는지조차 잊어버리기도 하지요. 그래서 가끔은 "어? 이런 책도 있었네"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조차도 독서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는 반드시 순서대로, 차례차례 해내야만 하는 과제가 아닌 만큼, 어떤 날은 무거운 책을 펼칠 힘이 없어서 가볍고 짧은 책을 고르고, 또 어떤 날은 깊이 있는 사색을 원해 어려운 책을 붙잡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분과 상황에 따라 책을 고르는 것도 결국 저만의 독서 습관이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직 읽히지 않은 책들이 줄을 서 있는 것조차도, 제 안에 독서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느껴집니다.
4. 쌓여 있는 위안
책이 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아직 읽지 않았다는 건, 언젠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마치 집 안에 간식이 쌓여 있을 때 느끼는 든든함처럼, 책장의 탑은 제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오늘 읽지 못해도 괜찮고 내일도 시간이 없을 수 있지만 책은 제 곁에서 묵묵히 기다려 줍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책장을 바라보며 ‘읽지 않았지만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위안을 얻습니다. 책은 저를 다그치지 않고, 오히려 ‘괜찮다, 너는 아직 충분하다’라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쌓인 책들은 제 삶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조용한 안식처 같은 존재라 생각합니다.
5. 선택의 흔적과 충족감
쌓여 있는 책들을 바라보다 보면 제 취향과 선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 서점에서 왜 그 책을 집어 들었는지, 어떤 문장이 마음을 움직였는지, 지금은 잊었더라도 제목만 봐도 유추할 수 있죠. 또한 책을 산다는 행위 자체가 저의 배우고 싶다는 욕망의 증거이자 지적인 갈증을 채우려는 의지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책을 사놓는 게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자리잡았습니다. 읽지 않아도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 저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것이 단순한 생각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지적으로 충만해집니다.
6. 미루어진 독서의 시간
쌓아둔 책들을 언젠가 읽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행길 비행기 안에서일 수도 있고, 한가로운 주말 오후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당장 읽지 않았기에 더 좋은 순간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펼치지 않은 책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간직한 선물 같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기대를 품게 합니다. 읽지 않은 책이 있다는 건 새로운 배움과 깨달음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며 오늘도 책을 쌓아둡니다.
7. 지금의 나를 닮은 풍경
책장을 바라보면 책들이 지금의 저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책은 무거워서 아직 펼치지 못했고, 어떤 책은 가볍게 보이지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면 지금의 제가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책의 높이와 무게는 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비춰 줍니다. 잔뜩 쌓여 있는 책 더미는 제 미뤄둔 마음 같고, 반쯤 읽다 멈춘 책은 제게 남겨진 과제처럼 보입니다. 동시에, 아직 손대지 않은 새 책들은 제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호기심과 열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책이 쌓여 있는 풍경은 단순히 독서를 미룬 흔적이 아니라, 지금의 저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초상화 같습니다.
fin. 책이 쌓여 있는 이유
결국 책을 사놓고 쌓아두는 이유는 복잡하네요. 미루는 습관이기도 하고, 미래를 향한 약속이기도 하며, 안정감과 충족감을 얻는 인간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마 앞으로도 책을 사고, 읽지 못하면 또 쌓아둘 겁니다. 읽지 않은 책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는 약속이고 제 삶에 남아 있는 가능성의 증거이니까요. 언젠가 펼쳐질 순간을 기다리며 저는 오늘도 책을 하나 더 들고 돌아옵니다. 쌓여진 책은 결국 읽히지 않아도, 그 자체로 제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풍경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