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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미인 앨리 Oct 02. 2022

흔적을 지우는 지우개

<< 나는 지우개야 >> (안나 강 글, 크리스토퍼 와이엔트 그림)


쓱쓱쓱


어지러운 책상 위.


괜히 뭔가 끄적거리고 싶어 연필을 찾는다. 강의나 책 읽을 때 메모하는 것 말고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필통에서 연필을 찾는다. 그리는 데는 영 소질이 없지만 생각나는 대로 그려본다. 어라,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에 서둘러 필통을 뒤진다. 커다란 흰색 필통 안에 뭉툭한 머리, 직사각형 모양으로 시꺼먼 때가 낀 지우개가 눈에 들어온다. 닳아진 종이옷을 입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지우개. 연필 자국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손가락 크기만 한 지우개는 언제나 내 필통 안에서 얌전하게 대기한다. 

내가 요청할 때마다 도와주며 내 손길에 따라 움직인다.

빠르게 느리게 지우는 속도에 따라 지우개는 자신을 희생하며 연필 흔적을 지운다.

조금씩 닳아져 모습이 없어져도 아무런 불평이 없다. 흔적을 지우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인생이기에 사람 손길 따라 생명을 유지한다. 지우개 재질에 따라 부드럽게 잘 지워지기도 하고 거칠게 지워지기도  한다.

자신은 닳아 없어지지만 가루라는 독특한 흔적을 남긴다.

자기를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우는 속도에 따라 흔적을 남기는 지우개 가루는 우리 몸에 나오는 때처럼 가늘었다 굵어졌다 반복하며 나타난다. 이것을 계속 뭉치면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데 만지면 이상하게 기분이 묘하다.

말랑말랑 말랑이처럼 기분이 좋아지며 또 다른 장난감이 된다.

한 손가락으로 지우개 끝을 대고 튕겨본다.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지우개 따먹기 놀이가 생각나며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학교 수업이 마치면 구석진 곳에서 아이들과 지우개 따먹기 놀이에 열중한다. 그때는 모든 물건이 다 장난감이었다. 지우개 따먹기로 지우개를 많이 가지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가 된다.

어린 시절을 소환한 지우개는 내가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도 안다. 동그랗고 길쭉하며 별 모양 등 다양한 모양이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잘 지워지는 것은 사각 모양이다. 


가끔은 인생에 있어 지우개가 필요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지우개로 지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은 일, 내 실수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던 일 그리고 영영 지우지 못해 트라우마로 남는 일을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우고 싶을 때가 있다. 


연필 흔적을 지우는 지우개.

문지르면 지워지는 지우개가 지금 불안하고 불편한 내 마음도 지울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신경 쓰이는 이 불안함의 흔적을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다.



- 출처: 알라딘 -

<< 나는 지우개야 >> (안나 강 글, 크리스토퍼 와이엔트 그림 / 키즈엠 2020) 그림책에 등장하는 지우개는 항상 연필의 실수를 지운다. 하지만 연필과 다른 친구들은 그런 지우개가 얼마나 소중한지 인정하지 않는다. 연필은 언제가 자신이 최고이고 그런 행동을 하는 지우개는 연필이 미웠다.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친구들 때문에 지우개는 너무 속상하다. 자존감을 찾으려는 노력하는 지우개를 보며 흔적을 지우고 싶은 나야말로 내 노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지우개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어쩌면 지우고 싶은 흔적이 내 존재감을 찾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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