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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미인 앨리 Jul 24. 2023

초등학교 교사가 죽음을 택했다

< 공감 에세이 >


초등학교 교사가 죽음을 택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교권이며 학생인권이며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암울한 소식을 접한 뒤 마음이 착잡했다.

작년에 한 중학교 교실에서 학생이 한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한 소식이 생각났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설명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장면은 정말 최악이었다.

도대체 그 학생은 선생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신병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정신이라면 적어도 교육을 받은 학생이라면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왜 이렇게 교권이며 학생인권이 무너진 것일까?

학교교육과정에서 '학생인권' 및 '아동 인권'이 생기면서 이상한 분위기가 생겼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학생 눈치를 보았다. 학생들은 그 분위기를 간파했는지 선생님을 조금씩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학생인권이나 아동 인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학생들이 이 인권을 악용한다는 점이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은 선생님을 '샘'이라 불렀다. 엄연히 선생님과 샘은 다른 의미다.

아이들은 말한다. "선생님끼리는 샘이라고 하잖아요." 이건 마치 부모와 아이 간의 자주 싸우는 대화 중의 하나였다. 엄마 아빠는 하면서 우리는 왜 안 되냐는 식이었다. 또 하나는 아이들은 선생님한테는 인사하지 않으면서 태권도 관장한테는 90도로 인사한다. 수업 시간에 그 주제로 이야기하는 도중 한 아이가 "꼭 인사해야 하나요? 우리 엄마가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요."

아무리 교육적으로 인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안 될 때가 갈수록 늘어난다.

현장에서는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은 답답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작년 가을, 나 또한 학생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코로나가 아직 진행 중이라 온라인 수업을 한 후 처음으로 학생들과 대면 수업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아이들 볼 생각에 수업 준비도 더 열심히 하고 설렘으로 수업 진행했다.

수업 진행 특성상, 토론을 진행했는데 다른 그룹과 달리 한 그룹이 매우 떠들었다. 수업과 상관없는 잡담으로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줬다. 이건 아니다 싶어 그 팀만 과제를 내주었다. 어려운 과제도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정리해서 다음 시간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자 덩치가 큰 한 아이가 갑자기 화를 냈다.

"왜 우리만 해요? 다른 선생님들은 하라는 말 안 하는데!"

천천히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자 고함을 질렀다. 마지막 수업이라 수업이 끝난 후 청소하는 시간이었다.

내 말을 안 듣고 자기 말만 하던 그 아이는 갑자기 밀대 걸레를 가져오더니 그것으로 땅을 땅땅 치며 나를 협박했다. 왜 시키냐며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난동을 부리자 1층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무슨 구경이나 난 것처럼 창문에 매달려 어떻게 진행되는지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에 난 부들부들 몸이 떨려왔다. 그 아이는 그 상황을 보러 온 아이들이 마치 자신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더 크게 더 격하게 행동을 하며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나보다 덩치가 크고 눈을 부라리며 협박하며 다가오는 커다란 그림자에 난 어떠한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순간 두려웠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눈물이 울컥 차올랐고 여기서 울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을 크게 뜨며 입술에 힘주었다. 미세하게 떨려오는 흔들림에 무너질 것만 같았을 때 다른 선생님이 달려왔다.

1학년 주임 선생님이셨다. 일단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난 뒤 자초지종을 물으셨다.

그제야 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말하면서 내 온몸이 부들부들 떨어야만 했다.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고작 이러려고 지금까지 수업한 건가?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과 수업하고 싶어서 내가 가진 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한 일이 이렇게 잘못한 일인가?'라는 자괴감에 빠져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교무실에 불러간 후 주임 선생님과 학생 지도부 선생님이 오셔서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아이였다. 그렇다면 담당 선생님이 귀띔이라도 해주었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무도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외부 강사라서 그런 것인가.

그날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울컥한다.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번다고 그동안 노력했던 내 모습을 비웃을까 봐 누구한테 말도 못 했다.

"그러기에 누가 너 더러 그런 일 하라고 했니?"라고 오히려 나를 야단칠까 봐 두려워 혼자 끙끙 알았다.

어쩌면 죽음을 선택한 그 교사도 그런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심한 모욕을 당했으니 오죽하랴.





교육현장에서 정말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쳐 주는 선생님들도 많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는 일이 발생하면 요즘 학부모님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생님부터 잡는다. 그런 것을 알기에 학기 초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어떤 아이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할 정도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교육은 오로지 학교 몫이어야 할까? 아니다. 가정에서부터 인성교육은 필요하다.

학생도 부모도 인성교육은 처음부터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아이 교육에서 있어 최고의 진단을 내린다는 오은영 박사의 자녀 교육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을 던지는 일도 생겼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이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방법을 알려준 오은영 박사의 교육 방법이 다 옳은지에 대해 물음표가 생겼다.

현재 우리 사회에 곳곳이 멍들어있다.

책임자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고 내 탓이 아닌 남 탓만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썩을 대로 썩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현상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 알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그저 가슴을 칠 뿐이다.

초등학교 교사가 죽음을 선택했다. 그녀로서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참기만 하던 교사들이 일어났다. 교권과 학생인권, '0'에 중심을 잡는 저울처럼 지금은 균형 잡힌 권리와 의무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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