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포도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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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를 따러 갔습니다.

소비뇽은 청포도(이탈리아에서는 백포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이트 와인이겠죠

사실 화이트 와인의 색은 우리나라 파란불처럼 흰색이 아니네요!)입니다.

보통은 백포도를 먼저 수확하고 적포도는 나중에 수확합니다.

또, 같은 백포도라 할지라도 종에 따라 소비뇽은 조금 일찍

리볼라 잘라의 경우에는 조금 나중에, 그리고 지역이나 고도 당해의 날씨 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고요.

개인 포도밭이 아닌 실제 와이너리에서 포도 수확을 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습니다.

다행히 함께 와인을 공부한 친구가 와이너리 주인과 친분이 있어

저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백포도 수확은 동틀 무렵에 시작됩니다.

물론 대형 와이너리는 기계로 쓸어 수확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곳과 같은 소규모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곳에서는

한 송이 한 송이 숙련된 사람들이 손으로 직접 수확을 합니다.

해가 뜨고 낮이 되면 기온도 올라가 작업이 어렵거니와(포도 나무는 키가 작아 그늘이 없습니다. 또한

보통 볕이 잘 드는 언덕에 위치합니다)

또 너무 높은 온도에서 포도를 수확하면 아침에 비해 산화 속도도 빨라지고

포도만의 신선한 향도 감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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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15분 친구 베로니카와 만나 함께 와이너리로 향했습니다.

15분 늦는다고 문자가 왔길래 아침 5시 반에 문을 여는 집 근처 베이커리로 가서

몇 종류의 브리우쉬를 사고 모카포트에 커피를 내려 갔습니다.

베로니카에게 내 차로 함께 가자 하니

내 것까지 점심을 싸왔다며 짐을 잔뜩 내려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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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너무 건조해서 산불이 났었던 지역을 지나니

아직도 까맣게 그을린 산등성이들이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마당발인 베로니카는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빠가 될 동기 이야기며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아이 둘에 네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지만 혼인 신고나 결혼식 계획이 없는 친구도 이곳에서는 유독 특이한 경우가 아닙니다)

남자 친구가 직장을 옮긴 이야기며, 크로아티아로 다녀온 휴가 이야기로 한 시간 이상의 운전이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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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랑 언덕길을 지나니 포도밭에서 이미 여나무 명의 사람들이 한창 포도를 따고 있습니다.

우리도 점심과 간식 가방을 매고 언덕을 오릅니다.

아직은 언덕 반대쪽에서 해가 비추는 지라 포도 밭은 그늘로 선선합니다.

와인 생산자인 파비앙의 엄마, 아빠, 엄마 친구, 동생 일라이아, 친척, 동생 친구, 동네 지인 등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고

바로 포도를 땁니다. 각자 자신의 통에 한 송이 한 송이 갓난 강아지를 뉘이듯 내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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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아는 포도 나무 사이를 돌며 가득찬 통은 가져가고 빈 통을 주고 갑니다.

일라이아가 부르는 노래에 사람들이 모두 웃으며 따라 부르는 걸 보니

저는 모르지만 비 내리는 호남선 같은 유명한 노래인가 봅니다.


파비앙의 어머니는 내가 신기한지 내 옆에 붙어 아침은 먹었나, 어디 사나, 뭘 하나

물어보시고 내가 가져온 가위는 못 쓰겠다며 전문가용 절단 가위를 얻어다 주십니다.

"이게 훨씬 낫지? 응?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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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 먹고 하자! 하는 어머니 소리에 사람들은 일제히 그늘진 곳으로 모입니다.

아침부터 준비하신 카페라떼와 빵 등을 나무 바구니에 면보를 깔고 담아오셨습니다.

조금 있다가는 아이스박스에 직접 만든 차가운 레몬에이드를 내놓으십니다.

달콤하고 상콤한 그 맛이 얼마나 좋던지

레시피를 여쭤보니 또 상세하게 알려 주십니다.

너무 손이 많이가서 아마 저는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0시 정도가 지나니 해가 딱 비춰

덥다 못 해, 목 뒤며 팔뚝이 타는 것처럼 뜨겁습니다.

너무 더워 안경을 벗어 티셔츠에 걸쳤습니다.

사람들이 지친 것을 느꼈는지 능청스러운 일라이아는 아저씨들에게 야한 농담도 하고

일부러 실없는 소리를 걸고 다닙니다.

"타라! 찾았잖아! 와! 이렇게 많이 땄어? 한국어로 인사할 때 뭐라고 해?"


"점심 먹자!"

11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 점심 시간입니다!

포도덩쿨로 덮힌 케노피 같은 지붕 아래 50년도 넘었다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먹습니다.

누군가는 아예 도톰한 도자기 그릇을 가져와 따뜻한 스프를 덜어 여유롭게 먹습니다.

베로니카가 싸온 참치 펜네 파스타와 피노키가 이렇게 꿀맛입니다.

함께 커피를 나누어 마시고 잠시 휴식 시간.

아. 안경. 안경이 없네요!


혹시 나 때문에 신경을 쓸까 혼자 몰래 빠져나와 지나온 길들을 살피지만

바닥에 온통 포도 잎들이 떨어져 있어서 도통 바닥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땡볕에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허리를 숙이고 안경을 찾으러 헤매다 보니

사람들은 이제 다시 포도밭으로 하나 둘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 안경은 무려 15년도 넘은 안경입니다.

그 당시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나름 큰 맘 먹고 샀는데

지금까지 고장 한번 안 나고 잘 써왔습니다.

안경 하나 잃어버린 것인데 15년 간의 추억들이 불현듯 떠오르며

너무 서운합니다.

돌아가 베로니카와 일라이아에게 안경을 잃어버려서 찾느라고 자리를 비웠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와 사람들이 모두 포도밭을 함께 뒤져 보았지만, 안경은 찾지 못 했습니다.

"괜찮아요. 이 핑계로 다음 해에 다시 오게 되었네요."

"안경 찾으러?"

"네."

파비앙의 아버지가 웃습니다.


2시가 못 되어 오늘 소비뇽 수확은 끝이 났습니다.

파비앙은 베로니카와 나를 와이너리에 초대했습니다.

오늘 딴 포도들이 어떻게 와인이 되는 지 그 과정을 다 보여주고 설명해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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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리에 도착하여 몸을 조금 씼고 파비앙이 스테인레스 탱크에서 바로 뽑은

포도즙을 한 잔 씩 마십니다.

제 첫사랑도 이렇게 달콤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마당에서는 한창 방금 우리가 딴 소비뇽 포도 송이를 줄기와 알고 분리하는 작업 중입니다.

이미 먼저 수확한 피노 그리조는 1차 발효 중입니다.

파비앙을 따라 흔들거리는 사다리를 덜덜거리면서 밟고 올라가

5미터 정도 되는 이녹스 발효조 꼭대기까지 올라가 뚜껑을 열고 효모들이 뽀글뽀글

열심히 일하는 현장을 목도합니다.

1차 발효가 끝난 피노 그리조도 발효조에서 바로 따라 마셔 봅니다.

완벽한 와인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벌써 피노 그리조의 특징인

네스폴라나 노란 자두의 향 등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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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평상복을 갈아입은 파비앙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작년에 병입한 와인들을 내놓으십니다.

바닥에는 수백년 전의 우물이 흐르는 오크통이 가득한 칸티나에서

포도가 익어가는 향기를 맡으며 와인을 한 모금 하니

모든 피로가 금새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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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와이너리를 떠납니다.

파비앙의 어머니는 아직도 안경 이야기이십니다.

"안경 어떡하니. 우리가 포도 잎 주우러 갈 때 다시 한 번 볼께.

집에 다른 안경은 또 있는 거지?"


자동으로 여닫히는 트렁크인데

베로니카가 완력으로 열고 닫으려 해서 트렁크 문이 조금 멈췄습니다.

신경이 쓰이던 찰나 파비앙네 검정 고양이 미아가 다가와 내 다리에 애교를 부리니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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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그리 나쁜 눈은 아니라

안경이 없어 조금 천천히 운전했습니다.


"그래! 또 만나자! 안드레아는 왜 연락이 안 되니?

언제 다 함께 뭉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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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는 데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길구나.

내년 초 쯤이면 내 손으로 직접 수확한 와인이 판매되고 마셔볼 수 있다니!



<와인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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