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발을 디딘지도 이제 여러 해가 되어간다. 하루하루는 이탈리아 국철처럼 느리게 흐르지만, 일 년 일 년은 한국 KTX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한국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 이탈리아도 어차피 한국이랑 비슷한 위도의 반도국이라 사람들 습성이나 문화가 비슷하지. 걔네들 마늘도 좋아한다며. 알리오 올리오 안 먹어 봤어?
허나 가끔 나는 이탈리아인들이 다른 행성에서 온 전혀 다른 생명체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중에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습성이 바로 선탠 문화였다.
이탈리아 말로는 Prendere il sole(쁘렌데레 일 솔레: 햇볕 쬐기)
저번에 요코랑 호수에 놀러 갔다가 알프스 산동네 산딸기 축제에 가서 우연히 요코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여름이라 더워서 나시를 입고 갔는데, 나를 보자마자
- 아니, 무슨 일이야? 맨날 바다에 간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하얘?
저기... 누가 서양인들은 다 사람들은 외모에 대해 말을 삼간다고 했나요?
아무튼, 내가 한국에서도 피부가 유난히 하얀 편이라 중학교 때 별명이 밀가루 빵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자기 피부를 꼭 빼닮은 백옥 같은 내 피부를 너무 소중하게 여겨 항상 밖에 나가기 전에 선크림을 발라주시고, 모자를 씌워 주시며 뿌듯해하셨다.
그런 내가 여기 이탈리아에 오니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백인인 이탈리아 사람보다 더 하얗더라.(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자랑이 아닙니다)
참고로 백인이라고 다 같은 하얀 피부가 아니다. 우리 황인종(우리는 바나나가 아닙니다!)도 나라별 지역별로 다르고 흑인도 그러하듯, 백인도 명도 및 채도 차이가 있다. 스칸디나비아나 북유럽 영국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그야말로 핏기 없이 하얗다. 저혈압일까 걱정이 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백인은 바로 이 백인이나 앵글로색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남부 유럽 사람들은 일단 디폴트 스킨 컬러가 북유럽 사람처럼 실핏줄까지 보이는 창백한 하얀색은 아니다.
내 생각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몸매나 얼굴이 구릿빛일 때 가장 아름답게 설계되었다.
겨울엔 다들 원래 본인 피부색으로 돌아오는데, 절대 여름에 느껴지던 그 묘한 생동감 있는 관능미를 느낄 수 없다.
장신의 건장한 바이킹의 후손 게르만들이 이 아담하고 날렵한 로마의 후손들처럼 아무리 태운다고 해도, 그 지중해 어딘가에 떠 있는 하얀 요트 위 돌체앤가바나 향수 모델 같은 느낌을 절대 살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 분위기 말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다 모델처럼 잘 생기고 예쁜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 마시길 (못생긴 사람은 어디에나 같은 비율로 존재합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참고).
아, 그리고 저번에 8월 말에 오랜만에 소믈리에 친구들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다들 나를 보더니 반가움의 와우!가 아닌 놀라움의 와우!를 건넸다.
- 와우! 왜 이렇게 하얘! 맨날 일만 했어?
이탈리아에서 피부가 하야면 이런 소릴 듣는다.
졸지에 아침부터 밤까지 휴가도 없이 일하는 역 앞 중국 가게 점원이 된 듯한 느낌.
그러면서 본인은 포도밭에서 일하느라 바다에 한 번도 못 갔는데 그런 자기보다 더 하얗다며 내 바나나 우유 같은 팔뚝 옆에 커피 우유 같은 팔뚝을 대 보는 것이 아닌가.
모임의 최고 연장자 에디는 얼마 전 우리 소믈리에 회원 중 베니스 근처 예솔로 해변에 호텔을 가지고 있는 부부를 만나러 갔는데, 그 친구들이 맨날 나오지도 못하고 일만 해서 그렇게 하얗더라면서 말을 덧붙이고, 내 천적 이골은
- 아니, 무슨 네로(Nero:네로, 이탈리아어로 까만색. 또는 세금을 내지 않는 야매라는 뜻도 있음)로 돈 버는 사람들은 피부가 비앙코(Bianco:비앙코, 이탈리아어로 흰색)인가?
라며 껄껄껄 웃었다.
이실직고 나는 모짜렐라( 모짜렐라 치즈처럼 태닝하지 않은 하얀 피부의 사람을 이탈리아에서 재미있게 표현하는 말)라고 했다. 바다도 자주 가지만, 단지 습관대로 선크림을 꼼꼼히 발랐을 뿐이고, 직사광선은 뜨거워서 나무 그들에 있었을 뿐인데 그나저나 이탈리아에서는 피부 하얀 것에 왜 이런 변명들이 필요한가.
중요한 건 나는 구릿빛으로 태워도 그렇게 예쁠 것 같지가 않다는 믿음이 있다.
머리도 까맣고 눈도 까맣고 이목구비가 모두 작은 소음인이자 전형적인 토종 백제인인 나는 아무래도 지금의 탄가죽 정도의 채도와 명도가 딱 좋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왜 이탈리아인은 뜨거운 태양 아래 하염없이 누워있나?
- 나도 처음엔 물만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진 찍고 물안경 쓰고 내가 아는 모든 수영 기술을 보여주기에 급급했던 시절이 있었다.
도대체 이탈리아인들은 왜 나무늘보처럼 한 평도 되지 않을 본인들의 비치타월에 누워 그 땡볕 아래서 꼼짝하지 않는 것인가! 수영도 안 할거면 시원한 집에 있지!
도넛 모양의 튜브에 몸을 동동 띄운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스피커가 찢어질 듯 울려퍼지는 현란한 비트의 K팝이 가득 찬 해운대와는 달리,
이탈리아 해변에 가면 정작 바닷물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반면, 뜨끈뜨끈한 모래 해변에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그런데 다들 아주 조용하다.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그냥 누워 있거나, 아니면 해변을 돌아다니며 네로로 돈을 버는 중국인 맛사지사들에게 마사지를 받기도 하고 흑인들에게 야매로 헤나 타투를 하기도 한다. 좀 과장하면 도서관처럼 조용하다.
그렇다, 그들은 어이없게 땡볕 아래에서 무려 책을 읽는다. 이 백제인의 작은 눈구멍으로도 너무나 많은 직사광선이 들어와 실눈을 뜨고 걸어야 할 판국에, 그들은 하얀 종이가 신나게 자외선 적외선 온갖 광선 및 복사열을 레이저처럼 발사하는 책을 읽는다!
연필이랑 지우개 가지고 수학 문제집 열심히 푸는 학생들도 봤다...
나처럼 눈이 새까만 사람은 까만 자동차가 더 쉽게 뜨거워지는 것처럼 햇볕에 더 쉽게 손상되고, 이탈리아인처럼 파랗거나, 회색이거나 갈색인 눈들은 까만 눈에 비해 흡수하는 빛의 양이 적어 피해가 적다는 것을 이탈리아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홍채의 명도가 낮은 사람들은 백내장 등에 더 조심해야 한다고.
(아니, 그렇게 치면 흑인들의 피부암 발생률이 백인보다 더 높아야 하는데 그 반대잖아?)
아무튼, 신기한 사실 하나는 갈색이나 금발의 이탈리아인은 여름에 햇빛을 받으면 머리색이 바래 더욱 밝아지고, 겨울이면 머리색이 더 진해진다. 그 차이가 확연해서 11월 정도 되면 마치 뿌염 안 한 것 같은 사람들을 여기저기 속출한다.
보통 캔맥주나 물 가벼운 과일은 해변에서 먹기도 하지만, 대개는 주변 바나 식당에서 음료나 간식을 먹고 해변으로 들어온다.
문닫힌 열림교회처럼, 이탈리아 사람들도 자유분방할 것 같지만 사실 나름의 확고한 보수적인 룰이 있어 예를 들어 해변에서 벗어나면 무조건 옷을 걸친다. 해변 주변이라고 비키니나 상의 탈의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한국처럼 먹는데 목숨거는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해변에서 치킨 등 거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냄새 문제도 있고, 쓰레기 문제도 있고 어쨌든 편안하게 휴식을 위해 놀러 온 다른 사람에게 피해이니까.
또 이탈리아 사람들이 죽고 못사는 미적인 관점에서도 우아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추가로 의외로 여름이라고 바가지 가격이 따로 있지 않다.
밤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기타를 치며 맥주를 마시는 젊은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고성방가도 없고 취한 사람도 없다.
... 하지만 춤추는 사람은 많다!
(격렬한 K팝 댄스 아님 주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해변에 가는 이유부터가 이미 한국인과는 다르다.
한국인은 피서(避暑)가 목적이지만 이탈리아인은 Prendere il sole(햇볕 쬐기)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건 영어의 Suntan(햇볕에 그을리기)과도 다르다.
이탈리아에서 선탠은 오직 살을 구릿빛으로 태운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찜질방 게르마늄 온돌에 가서 몸을 지지고 신비의 원적외선을 받는 것처럼 그들은 햇볕으로부터 뜨거운 여름 정기를 받는 것이다.
그러다 너무 덥다 하면 우리가 냉탕에 잠시 들어가는 것처럼 이들은 잠시 바닷물에 들어가서 몸을 식히고 다시 뜨거운 여름 태양의 정기를 받기 시작한다.
따로 명상이나 티타임도 없고 언제나 들떠있는 이탈리아인에게 이 태양의 정기를 받는 시간이야말로 온전히 홀로 신체의 최소한의 부분만 가린 반 태곳적 상태로 무념무상에 접속하는 자기 성찰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하루 종일 미동도 없이 뜨거운 태양 아래 늘러 붙어 있더라도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경쟁하듯 몸을 태운다. 다수의 한국사람들이 경쟁하듯 몸을 하얗게 만드는 것처럼.
이것 또한 어디가 낫다고 말은 못 하겠다. 둘 다 너무 극에서 극이라.
하나 분명한 것은, 이탈리아 사람들도 옛날에는 하얀 피부를 선호했더란다. 왜냐하면 흰 피부야말로 땡볕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부와 우아함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지만 지금의 하얀 피부는 바닷가에서 휴가도 즐기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 상노동자를 상징한다. 더불어 같이 해변에 놀러 갈 친구도 없는 히키코모리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각이 더 선진화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이렇게 날짐승처럼 대책없이 태우지만 결국 우리처럼 직사광선에 늘어나는 주름을 고민한다. 시술 받는 사람도 많고.
점 하나도 용납하지 않고 다 빼버리는 한국 사람들보다는 덜하지만.
아무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끝까지 자연스러운 주름이나 잡티 따위 신경쓰지 않는 고차원 정신세계를 가진 인간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모에 죽고사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성형수술을 많이 한다. 얼굴에 지방 흡입이나 주름 개선 또는 가슴 성형 및 복부 및 허벅지 지방흡입 기타 등등.
이탈리아는 독일도 노르웨이도 아니다. 실용성보다는 철저하게 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이다.
한국 사람도 남방계처럼 구릿빛 피부가 어울리는 몸매와 얼굴이 있고, 나 같은 북방계처럼 흰 피부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으니 각자 어울리는 피부색으로 튜닝하는 건 어떤가요.
가끔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니 어쩜 그렇게 피부를 잘 관리했냐고 젊어보인다고 물어볼 때가 있다. 어이없게 쌀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거 맞지 않냐고 확신에 찬 얼굴로 묻는 사람도 있다. 저기요... 저 육식주의자입니다. 밥 없이 고기만 먹는 거 좋아해요.
아무튼, 그럼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 여러분이 중학교 고등학교 수업 끝나고 친구들이랑 바닷가에서 태양의 정기를 받으며 신나게 뛰어놀 때, 저는 12시까지 생활관에서 야자를 했습니다. 아니요, 낮 12시가 아니라 밤 12시, 자정이요. 이게 제 주름 없는 피부의 비결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