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집 없는 들개마냥 홀연히 저 앞에 보이는 아드리아해에 뛰어들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모카포트를 돌려 타짜도로 가루를 올렸다.
집안에 퍼지는 에스프레소 향으로도 마지막 학기에 밀려오는 이러저러한 스트레스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야무지다거나 똑소리나는 것과 거리가 먼 나는 졸업학점 계산만으로도 머리가 속이 울렁거렸다.
조교들의 답장은 형식적이었고, 나는 조급해졌다.
번역 에이전시들은 이미 보낸 번역본을 수정해달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을 보내왔다.
급기야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번 학기에 졸업을 못 하면 인생이 송두리째 뒤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적지 않은 내 나이를 계산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했던 실수들을 칡 뿌리처럼 곱씹었다. 쓴물이 끊임없이 나왔다.
순간 나는 다음 학기에 수강할 과목조차 고를 수가 없었다.
- 아리야.
- ...어?
- 새벽이니? 미안, 근데, 혼자 결정을 못 내리겠어.
- 뭔데?
- 수강 신청.
-뭐라고?
나를 이해한다는 뜻인지 어이가 없다는 뜻이지 모르겠지만 아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아리야, 있지 내가 무슨 결정을 해도 다 틀릴 것 같아.
- ...
- 내가 뭘 선택하든지 다 잘못될 것 같다고.
- 계획대로 되는 건 없어. 너도 알잖아. 그냥 지금 너 듣고 싶은 과목 들어.
나는 잠자는 친구를 깨웠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이 연결을 끊으면 마치 내 동맥이 끊길 것처럼 어떻게든 뭐라도 붙잡고 싶었다. 아리는 말을 이었다.
- 너 한 학기 더 늦게 졸업한다고 니 인생 달라질 것도 없어. 지금 너 하고싶은대로 해.
2년 간 이탈리아 공식 소믈리에 수업을 듣고 나면 응당 모두 자격 시험을 보게 된다. 수업을 수료했다 할지라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공식 소믈리에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이탈리아 학생들도 30% 정도가 낙방하는 깐깐한 시험이라 시험 전 나와 요코는 시립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고3 수험생과 같은 생활을 했었다. 물론 스트레스도 거의 한계치까지 올라 시험 당일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시험이 실시되는 호텔에 방을 얻어 하룻밤을 묵을 정도였다.
시험을 얼마 앞 둔 어느 날, 소비뇽 블라인드 와인 트레이닝에서 수업을 같이 들었던 다리오를 만났다. 저번에 같이 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시음을 갔을 때 안면을 튼 사이었다. 우리 수업은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국 토종인 나는 솔직히 이렇게 다양한 연령층이 한 곳에서 같을 것을 공부한다는 자체가 놀라웠었다.
다리오는 작은 에어컨 설치 사업을 하는 조용하고 성실한 학우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격 시험에 대해 물었다.
- 다리오, 시험 공부 잘돼가?
- 나 시험 안 보기로 결정했어.
- 뭐? 2년이나 공부한게 아깝지 않아? 왜?
- 소믈리에가 안 된다고 내 인생 달라지지 않아(Non cambia la vita!)
- 그래도...
- 나는 와인에 관심 있어서 이 수업을 들었고, 와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어. 그걸로 만족해.
순간 나는 그 환갑의 아저씨가 멋져보였다. 정말 인간적으로 멋이 있어 보였다.
결정을 잘 못하는 사람은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도 저것도 둘 다 놓치기 싫기 때문에 또는 조금의 손해도 보기 싫기 때문에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다리오는 자신의 생각을 신뢰했고, 흔들림 없이 어느 하나를 기꺼이 포기했다. 중요한 건 자신의 편안과 만족을 최우선으로 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제야 평소 그의 여유로운 표정과 태도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제 아예 잠이 깨버린 듯한 아리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 중요한 건 태도지.
- 태도?
- 응, 무슨 일이 닥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러 저러한 일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떤 삶을 사는지 결정하는 거 아닐까.
어차피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니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위시리스트에 사고싶은 물건을 신나게 담듯 듣고 싶은 과목들을 넣고 신청 버튼을 눌렀다.
내 머릿속 수강신청이 마술사 모자 속의 비둘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편안히 침대에 누웠다. 새벽의 가을 바람 소리는 은은한 휘파람처럼 멜로디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더블 침대에 홀로 누워 내 어깨를 가만히 안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