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와 나 7
(누드비치에 가는 법 1편 https://brunch.co.kr/@daram/39)
- 너한테 꼭 보여줄 게 있어.
- 우리 지금 알몸으로 바닷가에 누워있는데, 더 보여줄 게 있다고?
-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질꺼야.
여기 절벽에서 바라보는 선셋보다 예쁜 선셋을 본 적이 없어.
이곳은 엄연한 이계였다.
조약돌이 끝없이 펼쳐진 절벽 아래 파도마저 숨숙인 야생의 세계.
성경에 나오는 초목이 무성하고 항상 맑은 물이 샘솟고, 온갖 동물과 새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
오직 바다, 태양, 나만이 존재하는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페르시아어로 '담으로 싸인 마당'을 의미한다고 한다.
낮은 돌담으로 싸인 바로 이곳이야말로 낙원임에 틀림없다.
보통 해변의 젊은이들 앞을 지나면 간혹 맡던 마리화나 냄새도 나지 않았고 심지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었다. 그 흔한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음주 금지나 흡연 금지, 사진 금지 표시도 없었다.
여기서는 모두 당연한 것처럼 순수했다.
모두 발가벗고 있을 때 가장 음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린 교복을 입고 책상에 앉은 아이들보다 순수했다.
햇살이 내 알몸을 따뜻하게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다.
- 근데 저 양반 뭐하는 거니?
- 몰라, 왜 아까부터 하필 우리 앞에서 알짱거리지?
- 꼭 저런 사람 있다니까. 뭐, 양인이랑 아시안이랑 뭐가 다른가 보려고 하는 거야?
- 웃기네, 뚫어지게 쳐다보고 비웃어주자.
- 아예 눈길도 주지도 않는 게 나아.
- 알게 뭐야, 우리가 옷 다 입고 길거리 다녀도 이 시골에서는 쳐다보는 사람 한 보따리잖아.
요코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쭈구리 같은 양인도 쫓아냈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요코는 나에게 완벽한 선셋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평소와 다르게 서둘렀다.
- 이제 슬슬 짐을 싸고 올라가는 길을 찾아야 해.
짐을 싸고 바닷물에 젖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을 나섰다.
- 이 길을 따라 쭈욱 걸어나가야 해. 내가 먼저 걸을께 나를 따라와. 기억이 잘 안나서 나도 찾아야 해.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나도 사람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 말고도 내 시선을 끄는 것들이 너무 많아 벌거벗은 사람따위 볼 시간이 없었다.
바다로 천천히 빠져들 준비를 하는 자몽빛 태양과, 시시각각 변하는 찰랑이는 바다,
아기자기 자연의 조각으로 꾸며놓은 자연주의자들 각자의 파라디이스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급기야 내 싸구려 고무 쪼리는 한 쪽이 뜯어져 맨발로 돌길을 걸었다. 발바닥이 아팠다. 뒤늦게 발견한 요코는 자신의 머리끈을 풀어 나에게 주었다.
- 이걸로 묶어. 미안, 너무 많이 걷지?
갈 때는 내가 메겠다고 했는데, 요코는 기어코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 아, 찾았다. 이 작은 불상! 여기 근처일거야.
요코가 가르킨 곳에는 손바닥만한 파란색 작은 불상이 놓여있었다. 누군가의 파라다이스 영역 장식이었다. 요코는 다시 만난 불상이 반가운 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한참을 걸었는데도 길은 나오지 않고, 해는 저물어갔다.
걱정이 된 요코는 벌거벗은 아저씨에게 가서 길을 물었고, 아저씨는 자기를 따라오라며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저씨의 알몸의 여자친구인지 아내인지도 미소를 지었다.
아마 길을 지나친 모양이다. 우린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요코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날 나는 평생 받을 발바닥 지압을 다 받았다.
요코는 벌거벗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묻기 시작했고, 다행히도 한 아주머니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알몸의 아줌마를 따라갔다.
우린 다시 불상 앞에 도착했다.
-여기 옆에 샛길 보이죠? 이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도로가 나와요.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해가 지고 있어요. 곧 어두워질거예요.
- 아! 여기였구나. 왜 기억을 못했지.
요코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에게 괜찮냐고 물은 후 다시 날다람쥐처럼 산기슭을 타기 시작했다.
근데 이건 길이 아니었다.
내려올 때 길은 가파랐지만 그래도 길이었는데, 여긴 그냥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지체할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우린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동그랗고 밝았던 해는 이제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오렌지, 포도, 자몽, 레몬이 섞인 노을만이 짙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날 사족보행을 시작했다.
요코는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아래를 쳐다보면 다리가 달달 떨릴 것 같아서 돌바닥만 보고 기었다. 잡고 올라갈 나무도 없는 암벽 그 자체였다. 두 뼘만 밖으로 내디디면 굴러떨어져 내 몸은 산산조각 날 것이다. 온 몸에서 땀이 났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먼저 중간 기점에 올라가 있던 요코가 위에서 나를 불렀다.
- 사진 찍자!
- 여기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진을 찍자니.
나는 길잃은 고라니처럼 후달리는 네 발 중 어떤 것 하나 떼지도 못 할 것 같은데.
- 그래, 찍자!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대책없이 생각없이 그냥 하는 날.
어떻게 어떻게 몸을 일으켜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이러다가 오줌을 쌀 것 같았지만, 사진에 그런 표정을 남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웃자!
- 저기 봐! 내가 말한 노을이야! 정말 예쁘지 않아?
다시 사족보행으로 겨우 기어올라가 요코가 서 있는 좁은 틈에 몸을 맞대고 섯다.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웠다.
무서워서 우는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내 용기에 느낀 기특함의 눈물인지. 하나 확실한 건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파라다이스가 닫히는 폐문을 보고 있노라니 최면에 걸리는 것처럼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주변은 더욱 어두워졌다.
- 가자!
앞장 선 요코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돌바닥만 보고 걷는 사족보행을 이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야생 동물의 삶을 체험하는 날이었다.
잠깐 궁금해서 절벽 아래를 내려보았다가 순간 어질해서 다시는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리가 당기고 허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얼마를 기어 올랐을까. 희미하게 차소리가 났다.
- 요코! 거의 다 왔나봐!
요코는 멀리서 대답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기었다.팔이 달달 떨렸다.
드디어 우린 현세로 돌아왔다.
깜깜한 4차로를 헤드라이트로 밝힌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좀비처럼 흙투성이로 산기슭에서 가드레일 밑을 기어 나왔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 살았네!
- Evviva!
주차한 곳까지 걸으며 우린 한참을 웃었다.
- 나는 네가 그렇게 빨리 홀딱 벗을 줄은 몰랐어.
- 나도 몰랐어. 나는 내가 여기 올 줄도 몰랐어.
- 대단해. 나는 네가 옷을 벗기 싫다고 하면, 벗지 말라고 하려고 했거든. 근데 네가 그렇게 적극적일 줄이야! 네가 여길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 그러니까! 이 여름의 끝에 여길 발견하다니! 요코, 고마워!
요코는 한번도 나에게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너는 싫어하구나' 하고 나를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요코와 같이 있으면 내 스스로 용기가 나서 이것저것 할 수 있게 되었다.
요코는 그저 '바다에 멀리 나가 수영하면 재미있어',
'누드비치가 있는데 정말 평화로워',
'스탠딩 보드 위에서 일어서봐, 정말 멋져!' 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요코를 만나 나는 불안전한 것들을 하나 둘 시도해 보았다.
안전한 선택이 안전한 삶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만 생각하며 살던 나에게 닥친 절대 불안전한 사건.
절대 예기치 못한 그의 변심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일 년을 헤맸다.
나는 천국에서 길을 잃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은 위험 대상이 아니었다.
언제나 답은 내 안에 있었다.
(누드비치에 가는 법 1편 https://brunch.co.kr/@daram/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