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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픽션] 지방의회가 있어서 다행이다.

처음 열린 인사청문회

by 꽃피랑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장관이나 주요 요직에 임명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인사청문회에서는 청문대상자의 위장전입부터 논문표절, 각종 비리와 갑질 등이 드러나고

결국 그들 중 몇몇은 낙마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해 국회만 인사청문회를 열어 견제했다면 2023년 지방자치법 개정을 통해 지방자치단체도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하여 정무직과 지방공기업 사장, 지방자치단체 출자ㆍ출연 기관의 장 등을 인사청문회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따라 A시에서도 인사청문회 조례가 제정되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장학재단 이사장 후보자 대상의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후보자는 평생을 A시에서 일했는데 약 5년은 청소년 부서에서 팀장으로, 2년은 과장으로 근무했다.

의회에서도 2년 정도 과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의원들과도 가까웠고 마지막으로는 국장으로 은퇴했다. 퇴임 후, 소일거리 겸 학원차를 몰다가 현 시장의 선거운동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유세를 도왔으며 쟁쟁한 경력의 경쟁자들보다 높은 면접점수를 받아 장학재단 대표이사의 후보자가 되었다.

그는 의회에서 일한 경력도 있고 개인적으로 의원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인사청문회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인사청문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은 가장 나이가 많은 조영만 의원이 맡았다.

후보자는 선서를 한 다음, 재단에서 준비해 준 모두발언을 낭독했다. 본격적인 질의응답이 시작되었다.


청년위원인 박세준 의원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후보자님께서는 20년 이상의 현장근무 경력이 많은 분들보다 면접점수를 높게 받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면접위원들이 평가한 거라

왜 제가 많이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내드린 사전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보니 장학재단이 평소에 제출하는 자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현 장학재단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해결책은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2년 넘게 현직을 떠나 있다 보니 공부를 많이 못했습니다. 사실 이 자료는 장학재단으로 통상적으로 준비한 자료에 제 생각을 조금 추가해서 만들었습니다.

제가 애들한테 관심이 좀 많아서...”

애들이라고요? 지금 장학재단 대표이사로 오실 분인데 그런 단어를 쓰시는 건 부적절한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장학재단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님에 대해 검증하는 인사청문회인데 내 생각은 조금 들어가 있고 나머지는 재단에서 준비해 주셨다니, 그건 스스로 준비가 안되었다는 말씀 아닙니까?”

이후 몇 개의 질문이 더 이어졌지만 그는 장학재단의 현황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기소개서에 쓰여있는 내용을 질문해도 정확히 답변하지를 못했다.


다음으로는 시장과 같은 당인 오미경 의원이 손을 들었다.

아직 후보자 신분이지만 대표님이라고 부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시작했다.

“대표님, 앞으로 장학재단 대표가 된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는 평소 소신을 말씀해 주세요.”

“네. 저희 장학재단은 공부하기 어려운 애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기관으로...”


오 의원은 일부러 후보자 편을 들어주려고 질문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청소년이라는 법적 용어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애들이라고 답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 의원의 질문을 제대로 못 듣고 “아까 두 번째 질문은 뭐라고 하셨었죠?”라고 도리어 반문하기도 하여 의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시간끌기용으로 장학재단의 설립목적처럼 기본적인 내용을 물어봐도 재단에서 써준 답변서를 뒤적이다가

결국 자기는 그런 것까지 못 외운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위원장인 조영만 의원이 질문을 이어갔다.

“후보자님은 국장으로 퇴임하자마자 현 시장의 선거캠프에 들어가셨습니다.

재직 당시에도 상당히 편향된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제보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사람에게 충성한 거지, 정당에 충성한 것은 아닙니다.”

“왜 시장님께서는 산하기관장들을 퇴직한 본인의 측근들로 임명하시는 걸까요?

이미 공개된 자료라 말씀드리면 공직에 계신 동안 10번도 넘게 문책받으셨던 후보자를 장학재단 대표이사로 임명하시려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문책내용도 주취 폭력행위, 근태태만, 심지어 성추행도 있습니다.

이런 분을 대표이사로 임명한다면 청소년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주의나 훈계는 경미한 사항이고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종종 점심시간에도 술 한잔씩 하곤 했었습니다. 남들은 그냥 마시지만 저는 양심적으로 한 시간씩 외출을 달고 술을 마셨어요.

성추행도 지금 시대니까 문제가 되는 거지, 예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요!”

적반하장으로 역정을 내는 후보자로 인해 청문회장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이후에도 조영만 의원은 그의 후배인 현역 공무원들로부터 받은 각종 제보들을 가지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지금까지 높은 직위에서 아랫사람들에게 갑질을 하고 괴롭히던 후보자가 다시 재단의 대표이사로 돌아온다면 오히려 자신들의 관리감독을 무시하고 현 시장과 직접 소통할 것이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위계적인 공직사회에서 선배에 대해 이런 제보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건 있었다는 것만 봐도 그의 평소 행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후보자는 난감해하며 형식적인 답변을 하거나 답변하기 곤란하다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내용들은 서기록에 남겨지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우선 인사청문회만 넘기고 대표이사가 되고 나서 보자.

그런 생각이 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조영만 의원이 마무리 발언을 하며 인사청문회를 마쳤다.

“후보자님은 청문회 준비를 전혀 안 하신 것 같고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 답변하고 준비하신 태도를 봤을 때는 저희 의원들과 청문회를 많이 무시하신 것 같아서 유감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우리 시에서 시장이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보은인사는 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상 청문회를 마칩니다.”


청문회 이후, A시 공무원 노조는 선배공직자가 부끄럽다며 후보자 임명을 철회하라는 시위를 날마다 열었다. 심지어 같은 당인 오미경 의원도 시장을 찾아가 후보자를 도와주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하소연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난감해진 시장은 후보자 임명을 차일피일 미뤘고 결국 후보자는 자진사퇴하고 말았다.

인사청문회가 없었다면 아무 검증 없이 그런 사람이 장학재단 대표이사가 되었겠지.

그나마 지방의회가 있어서 다행이다.


여러 지방의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상의 의회와 가명으로 만든 다큐픽션 형식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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