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오피스빌런들
어디나 오피스빌런들이 한 두 명씩은 꼭 있다.
의원들이야 높은 분들이고 사무실이라도 분리되어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같은 사무실에 있는 오피스빌런들은 매일 봐야 한다는 점이 힘들다.
밖에서 보면 공무원들이 별일 안 하면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줄 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와 보면 ‘공무원이 이런 일도 하는구나!’ 놀라게 된다.
비나 눈이 많이 내린다는 예보라도 뜨면 바로 비상발령이 뜬다.
실제 눈이 많이 오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돌아가면서 비상소집문자가 오고 1시간 안에 정해진 곳으로 가야 한다. 선거 때나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축제나 행사도 지원해야 하고 민생회복 지원금 같은 일들이 갑자기 중앙정부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평온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건, 상당 부분 공무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집행부에 있다가 의회로 온 공무원들은 비상소집에 가지 않아도 되고 숙직을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좋다며 행복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모두가 1.5배씩 자기 일을 하는 반면, 0.5인분도 안 하는 직원이 하나 있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가 굉장히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의 모니터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었는데 항상 다음 주 스케줄표나 회계 관련 화면이 떠 있었고 야근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업무분장표만 보면 부서 일을 혼자 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주위에 앉아있던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루 종일 문서의 줄간격을 늘이거나 줄이고 멍하니 모니터를 보면서 아무 의미 없이 몇 시간씩 보낸다고 했다. 그에게 일을 지시하면 제대로 진행이 되지를 않는데 혼자만 항상 바쁘다,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수군거렸다. 어차피 자를 수는 없으니 시간만 보내다 언젠가 승진하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흔히 일 안 하는 공무원이라고 일컫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극소수의 이런 사람 때문에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의 공직사회 구성원 전체가 욕을 먹게 되는 듯하다.
일 안 하면서 힘들다고 하는 직원은 같은 팀만 아니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정치적인 유형의 빌런은 대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 회사에서도 말단 직원이지만 팀장보다 과장이나 부장과 친하다는 이유로 팀장을 무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의회는 기존 조직과 달리, 눈치 봐야 할 윗사람이 여러 명이다. 전라도나 경상도처럼 특정 당이 우위에 있는 곳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의회는 여당과 야당이 섞여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인 유형의 빌런은 한쪽 편을 들게 되고 그것이 의회에 갈등을 불러오게 된다.
의원 2명당 정책지원관 1명을 배정하는 의회도 있지만 내가 있던 의회는 집행부의 분야에 따라 업무를 구분했다. 나와 함께 입사한 정하윤 지원관은 시설직이었기 때문에 도시개발, 교통, 토목 등 시설 관련 부서를 맡았고 나는 복지, 문화, 일자리와 예산 등 시설 외의 업무를 담당했다.
처음에는 업무가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담당한 복지와 문화, 일자리 등 대부분의 부서에는 관련 시설들이 있었다. 한 예로 복지 부서에는 장애인복지관, 노인복지관이 있고 문화에는 문화예술회관, 일자리 관련 부서에는 지식산업센터 등이 있는 식이다.
장애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시각, 청각, 지체, 정신 등 대상이 다양하게 구분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새롭게 사회복지사업을 신설하려면 보건복지부와 협의도 거쳐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장애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정하면서 정책을 만들거나 조례를 개정하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장애인복지관의 문턱을 없애거나 자동문을 설치하는 등의 시설개선은 예산만 투입하면 되고 이용자들이 즉각적으로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시설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나와 정하윤은 같은 정책지원관이지만 미묘한 갈등이 생겨났다.
여러 지방의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상의 의회와 가명으로 만든 다큐픽션 형식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