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중립성 의무
어느덧 입사한 지 1달이 지났다. 그 사이 처음으로 조례를 만들기도 하고 제안설명이나 보도자료도 작성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낯선 일이다 보니
모든 게 실수투성이였다.
“지연 씨, 좀 와보실래요?”
“네.”
“여기 보시면 실종아동 등이라고 띄어쓰기를 했는데 상위법에 보면 실종아동등이라고 붙여쓰기가 되어 있어요. 상위법에 맞춰주시고 상위법 명칭과 조문번호 사이에는 한 칸 띄어쓰기가 되어있어야 해요.
여기 조항 보시면 상위법 제5조에 따른다고 되어있는데 개정되면서 조항번호가 바뀐 것 같으니 확인해서 바꿔주시고 폰트나 여백 등도 안 맞는 게 있던데 법제처에서 나온 자치법규 입안 길라잡이 참고하셔서 맞춰주세요.”
분명 조례안을 출력해서 여러 번 확인했는데도 실수투성이였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가는데 함께 입사한 정하윤 지원관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처음 조례 만드려니 여러 가지로 힘드시죠?
혹시 법령안 편집기는 써보셨나요?”
“아뇨. 그게 뭐예요?”
“법제처에서 만든 프로그램인데 그걸 쓰면 개정문이나 신구조문대비표도 만들어 주고 오타나 번호 오류도 잡아줘요. 서식도 다 맞춰주니까
한번 들어가서 보세요. 저는 법령안 편집기로 초안을 만들고 한글로 맞춤법도 여러 번 돌리면서 조례안 만들어요.”
“네. 감사합니다.”
너무 초보적인 실수가 계속되니 스스로 자괴감이 들 지경이었다. 그나마 팀장님이 검토하고 알려주시면 다행이었지만 이미 자료출력해서 의원님들에게 배부한 다음에 오타나 잘못된 것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나를 채용한 걸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반면, 정하윤은 나보다 10살이나 어리지만 이미 의회에서 3년 정도 일한 경력 때문인지 뭐든 척척 해냈기 때문에 더 비교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내가 있던 의회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복지부동한 자세로 일을 했었다.
회기마다 조례는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1개씩, 혹은 집행부에서 추가로 요청하면 2개 정도 발의했고 의원들의 5분 발언은 거의 없었다.
시정질문 역시 거의 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하게 될 때도 회의가 열리기 전에 집행부에 질문지를 보내서 그에 대한 답변서를 받았다.
겉으로는 질문하고 그에 대해 답변하는 민주적 과정이지만 사실은 정해진 틀에 맞춰 흘러갔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은 박세준 의원의 등장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박세준 의원은 무사안일에 익숙한 A의회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청년의원이었다. 지금까지 보도자료는 홍보팀에서 써주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는 자기가 발의한 조례에 대해 스스로 보도자료를 썼고 다양한 지역 주민들을 만났다.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5분 발언을 하고 시정질문을 하거나 자료를 요구했다.
그가 1년 동안 요구한 자료만 100건이 넘을 정도였다. 자료를 보내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추가자료를 요구했고 그래도 안 풀리면 담당팀장이나 과장을 불러서 직접 확인했다. 갑작스럽게 업무를 지시하고 자료를 요구하는 게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그에게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에 싫지 않았다.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 어느 날 박세준 의원은 회기 때 했던 5분 발언과 관련해서 보도자료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지금까지는 기자가 써주는 것 외에는 홍보팀에서 공식 의회행사에 대해 쓰거나 의원발의 조례에 대해 보도자료를 작성했던 터라 이런 경우에는 보도자료를 작성해도 되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팀장님, 박세준 의원님께서 이번 회기에 발언하신 내용으로 보도자료를 요청하셨는데요.”
“흠.. 그래요?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하윤 씨, 전에 일할 때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했나요?”
“선거 때나 특별히 주민 사이에서 쟁점이 되는 게 아니면 작성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지연 씨, 그럼 의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작성해 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은 정하윤 지원관에게 그녀가 전에 일했던 의회에서 의원님들과 어떻게 일했는지,
어디까지 도와드렸는지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했던 사례들을 늘어놓으며
은근히 자기의 경험이 여기서 가장 많다는 것을 강조하곤 했다.
뭐든 조심스러웠던 나와 달리 그녀는 언제나 의욕에 넘쳤다.
어느 날, 박 의원이 우리 팀 모두를 방으로 불렀다.
“제가 오늘 모두 오시라고 한 건, 의정활동을 지원하시려면 무엇보다 현장을 잘 아셔야 하니까
다 같이 관내 주요 시설이나 이슈가 되는 곳들을 모아서 출장을 가시면 어떨까 합니다.
제 공약도 좀 설명드리고요. 제가 운전해서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팀장님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원님, 좋은 의도이신 건 아는데 업무 시간에 팀 전체가 자리를 비우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럼 1명은 자리 지키시고 2명이 먼저 가시죠!”
“의원님, 저는 꼭 가고 싶습니다.” 의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하윤이 당차게 말했다.
박 의원이 직접 운전을 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A시를 잘 아는 팀장님이 출장일정을 짜고 운전을 하기로 해서 나만 사무실에 남게 되었다.
의원들은 적극적이고 의회업무에 대해 잘 아는 정하윤을 나보다 먼저 부르기 일쑤였고
나는 마치 미운오리 새끼처럼 겉도는 느낌이었다.
모두 출장을 가고 나만 남아서 퇴근만 기다리던 금요일 오후,
“따르릉” 전화기에 조영만 의원 얼굴이 떴다.
“네, 의원님.”
“정하윤 지원관 없나?”
“네, 오늘 출장 가셨습니다.”
“잠깐만 내 방으로 좀 와요.”
환갑이 넘은 조영만 의원은 컴퓨터 작업을 어려워했다. 홈페이지에는 이메일 주소가 나와있지만 한 번도 본인이 열어본 적은 없었다. 메신저는 할 수 있었지만 한글문서 작성이나 편집은 하나도 못 했기 때문에
항상 부서에서 보낸 자료나 조례안들을 종이로 출력해서 가져다 드려야 했다.
그날도 문서작업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나 보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의 방에 들어섰다.
“의원님, 안녕하세요.”
“내가 당원들에게 단체문자를 좀 보내야 되는데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서.. 이것 좀 도와줘요.”
국회의원 예비후보 경선이 얼마 안 남은 시점이었다. 단체문자 내용은 조영만 의원이 지지하는 예비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의원님, 죄송한데 이거 도와드려도 될지 모르겠어요.”
“왜? 뭐가 문제야?”
“선거 관련한 문자라…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해서요.”
“내가 지연 씨 폰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폰으로 단체문자 보내려는데 잘 몰라서 물어보는 것뿐인데 뭘, 걱정 마.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됐지?”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문자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핸드폰을 어려워하는 의원님이
자기 폰으로 문자 보내는 걸 도와주는 것뿐이라는 설득에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의 폰으로 단체문자를 보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후 몇 달간 나는 그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여러 지방의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상의 의회와 가명으로 만든 다큐픽션 형식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