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찬영 Mar 10. 2024

연재를 마치며

네 마음속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니?



10년 전, 글쓰기 교수님과의 면담 중 나도 모르게 고백해 버린 속마음.


"저 글을 쓰고 싶어요."


교수님은 예상했다는 얼굴로 마음속에 쓰고 싶은 무언가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네"라고 답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말없이 휴지를 건네며 "그럼 써야지"라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끝까지 묻지 않았다. 물었어도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뻔한 이야기. 그도 알았을 것이다. 아, 얘가 어릴 적에 힘든 일을 겪었구나.


내 이야기를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해도 될까? 나중에 시집은 갈 수 있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의 약점을 절대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고. 그것이 언젠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두려웠다. 내가 알코올 중독인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렇게 수치스러운 것인지. 심지어 한국 가정의 1/3이 알코올 중독자를 가정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요즘 젊은 사람들 중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다던데.  



누군가는 세상에 자신을 마음껏 펼쳐내지만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치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인생이다. 지고 태어난 몸 하나만이라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떠나고 싶은 마음. 적어도 내 다음 세대에게는 이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

30년 만에 내가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어떻게 검색을 해도 그들의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나의 가정사를 숨기고 싶어 했듯, 자신이 알코올중독자의 자녀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은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필요했다. 그 여정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들의 여행기가.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었을 이 세상 모든 ACOA(아쿠아,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들의 이야기가. 중독, 수치심, 불안함, 우울, 그 모든 상처를 끌어안고 삶이라는 터전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가.


브런치 연재를 시작할 때 썼던 소개글이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당시만 해도 어떤 책이나 블로그에서도 ACOA(아쿠아,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은 좀 있으려나?) 신기했다. 스스로 알코올 중독을 이겨냈다는 이야기는 꽤 찾아볼 수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문제를 일으킨다."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도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 정도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가정환경으로 평가하곤 하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가정사에 대한 고백을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아빠가 돌아가셔서 요가를 시작했는데 요가가 재밌었다~라는 식으로 쓰려고 했던 글이다. 하지만... 결국 쓰고 말았다.


왜?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사적인 얘기를 왜 굳이 세상에 공개하는 거야?


결론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며 폭풍처럼 치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속도는 가히 '기하급수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작년 4월, 약 1년 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며 무언가 인생에 회오리가 치기 시작했다.


'글이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나는 미친 듯이 글을 썼던 대학교 때 다 치유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치부를 세상에 공개하겠다,라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상하게 나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들이 인생에 물밀듯이 찾아왔다.


'내가 원하면 온 우주가 그것을 도울 것이다'라는 말이 입증이라도 된 것일까. 아니면, '치유는 지금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었던 것일까.


어찌 되었든, 나는 이번 글쓰기로 어느 정도의 한을 풀어내었고, 또 개인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으니 한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는 꽤나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부끄럽지만 감히,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문학이 전공인 내가 어느 순간 소설을 끊어버린 시점이 있다. 바로 이야기를 읽다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당시 내가 원했던 것은 남의 이야기를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법'이었다.


하물며 소설도 이러한데 에세이는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여기 있네'라는 심정으로 글을 읽기 시작하는 독자는 어느새 작가가 내린 결론을 실제 인생에 적용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 이렇게 힘들게 살았어요'라는 식의 이야기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일시적으로 도파민을 끌어올려 조회 수는 높일 수 있으나,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나름 이것저것 내가 도움을 받았던 것들을 위주로 글을 쓰려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난해하거나, 재미가 반감된 것도 인정한다. 콘텐츠가 이리도 넘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에는 매우 역부족인...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적어도 두 사람은 인생에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한 사람은 나이고, 한 사람은 전폭적으로 나를 지원해 주느라 어쩔 수 없이(?) 글을 읽다가 자신의 어린 시절까지 되돌아보게 된 나의 반쪽이다. 그러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던 내 바람은 이미 두 번이나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 사람이 온다, 이병률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힘으로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다.'라는 구절을 '우리는 누구나 커다란 상처를 하나씩 품에 안고 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왔을 어머니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집안도, 말 못 할 사정 하나씩은 품고 있는 법이라고. 다만 그것을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라고.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무서운 말이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힘들다고 과거에 얽매이면 안 돼'라고 여겨질까 두려웠다.


인생은 모두 부업일 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본업이다. 부업에 목숨 걸지 말고 본래의 할 일로 돌아오라. 재가 되기 전에

- 길거리 시인


자신의 힘으로 문을 닫지 못한다고 하여, 영원히 문을 열어 둔 채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한 번은 문을 닫아보자. 너무 늦어지기 전에. 지난날의 상처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이가 재가 되어 버리기 전에.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한 ACOA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폭력을 경험하며 살았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힘든 일을 겪었을 때 가장 크게 도움이 되었던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조금은 잔인하지만,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던 그 기도문을...


하늘은 그냥 시련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 반드시 무언가를 배우라고 당신에게 그 일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번에 배우지 않으면, 다음번에는 더 큰 시련을 통해 그것을 배우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물어보십시오.

"제가 지금 왜 이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통해,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전 15화 척추뼈가 부러지고 나서야 깨닫는 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