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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영 Mar 03. 2024

척추뼈가 부러지고 나서야  깨닫는 진실

2022년, 6월. 척추뼈가 부러졌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병실에 누워 지난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심리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정확히는, 내가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당시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인생에 하등 이렇다 할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소설책과 시, 심리학 도서, 그리고 그 외의 자기 계발서 등등의 책들까지. 소문난 책벌레였던 사람이 정작 책으로 도움 하나 받지 못했다니. 이게 무슨 허무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좋아하던 습성은 버릴 수가 없어 유목민처럼 도서관을 어슬렁 거리던 그때, 구석에 작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책 몇 권을 발견하게 된다.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여는 법


이건 무슨 사이비 같은 말이야... 신천지나 기수련을 하는 사이비 단체에서 할 법한 문구가 잔뜩 쓰여 있었다. 종교에 대한 거부감 또한 가지고 있던 시절이라 그 책을 빌리러 사서에게 가는 것 자체가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작가에 대한 소개가 심상치 않다. '세계적인 영적 스승'. '마더 테레사가 상찬 한...' 며칠 동안 그 문구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이내 인터넷 검색창에 그 이름을 검색하게 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그렇게 그의 대표적인 책 <의식혁명>과 <놓아버림>을 구매하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조심스럽게 그의 책을 펼쳐 들기 시작했다.




발견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글을 연재하며 '치료'라는 단어보다 '치유'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려 노력했다. 사람의 마음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치료와 치유의 차이는, 전자는 단순히 증상이 회복되기보다는 그 상태를 일으킨 원인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고혈압에 항고혈압제를 처방하는 것과, 환자가 더 이상 화내고 억압하지 않도록 그의 삶의 맥락을 확장시키는 것은 전혀 다르다.

- 의식혁명,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적 맥락'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미친 듯이 탐독했던 <의식혁명>을 읽으며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이 바로 이 '의식적 맥락'이었다.


비상식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부모라면 오히려 그의 행동을 감싸게 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하지만 이 책은 인간의 마음에도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수치심, 분노, 자부심 등의 마음은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고, 용기, 사랑, 연민과 같은 마음은 우리의 에너지를 북돋아 준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의식을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사람이 주로 발휘하는 의식은 평생 동안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다 똑같은 존재야', '사람은 모두 평등해'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던 나에게는 천지가 개벽하는 이야기였다. 내가 감히... 사람을 판단해도 되나?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아무리 나의 부모여도, 나쁜 것은 나쁜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책에 나와있는 아주 상세한 단계들은 아주 명확하고 세세하게 그 마음을 알려주었다. 뿌옇게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상담을 통한 치유 사역에 있어 심리학적 기법과 성경의 원리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의 소유권 개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사 43:1)고 말씀하시는데, 심리학에서는 “너는 네 것이라”라고 가르친다.

- 진리 횃불, <영적 치유인가 심리 치료인가?>


치료와 치유의 차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데이비스 호킨스 박사는 치료와 치유의 차이가 '의식적 맥락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의 차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 둘의 차이는 바로 '나'라는 것에 대한 정의다.


지금까지 연재한 글을 쭉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 치유 여정은 '나를 찾고, 표현하면 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는 것 같다. 내 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내 몸이 싫어하는 것은 거부하라.


하지만 모든 영성 도서에서는 이야기한다. '나'라는 개념을 버리라. 나에 갇히지 말고 우주 전체를 소중히 여겨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두려움을 벗어던질 때, 진정한 나 '참나'가 찾아온다.


이 두 이야기는 완전한 정 반대의 이야기다. '나는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심리학적 이야기와, '나를 보호하지 말라'는 영성적 이야기. 이 두 이야기 사이에서 꽤 오랫동안 방황했다. 어떤 시기에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미친 듯이 화를 내다가, 어떤 시기에는 나라는 건 없다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대했다. 옆에서 보면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어느 날은 이 두 간극이 너무나 커서 견딜 수가 없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제 마음이 이렇게 힘든데, 과연 우주에 있는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게 옳은 일인가요?


당연하게도, 답은 아니오였다. 내가 올바로 서야, 남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치료와 치유의 차이가 있다. 심리학적 심리 치료는, '나부터 보호하는 법'을 알려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 하나 보호하는 법을 모르면서 다른 생명을 보호하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치유 없는 치료는 역시 불가능하다.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만약 진실로 자신이 치료되고, 그로 인해 주변의 모든 환경이 바뀌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만 가지고 있지 않은, 우주의 생명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것. 때로는 '영혼'이라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좌우하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말이다.


악을 모르는 선이 아니라, 악을 관통하는 선이어야 한다.

- 박노해


앞서, 내가 '사람의 마음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던가. 정정한다. 사람은, 치료와 치유가 모두 필요하다.


자신을 보호하는 법 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그럴싸한 말로 '나를 없애라'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픔을 딛고 나를 보호하는 방법을 익힌 사람이 '나만 잘 살면 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진정한 선을 행하기 위해선 악을 알아야 한다. 즉, 치유하기 위해선, 치료부터 해야 한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선 수많은 과학자들이 임상적 경험을 통해 밝혀온 그 방법. 좋은 말로 뭉뚱그리는 법이 없는, 아주 세세하고 정확한 그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악을 알았다면,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한다. 내가 바꾸고 있는 이 마음이, 사실은 나 하나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몸을 통해 이 땅에 온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생명을 구하는 것과, 남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완전히 동일한 일이라는 것. 그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치유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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