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그러면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해야 무의미한 제 인생에 의미를 붙일 수 있을까요? 저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철학자: 찰나인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추며 사는 걸세.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목적지도 필요 없는 그 춤을 말이야.
-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그 사건 이후 다시 방문한 상담소.
"엄청난 일을 하셨네요. 정말 너무 대단해요. 같이 박수 한번 쳐줄까요?"
박수라니... 부모를 버린 천하의 몹쓸 년, 이 아니라 박수라니. 겨우 멈췄던 울음을 다시 쏟아낸다.
"지금 감정이 어때요?"
아직 응어리가 남아있던가. 혹은,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참고 살았던 나에 대한 억울함이었던가. 가슴 한편이 답답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답답할 수 있죠. 혹시 그게 어디서 느껴져요? 그걸 풀어보기 위해 지금 뭘 해볼 수 있을까요?"
나는 다시, 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세상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요. 요가는 보통 직선적인 움직임이 많아서 관절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약간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여보는 것도 좋아요.
오늘도 매일매일 열심히, 수련을 하는 나에게 요가원 원장 선생님이 넌지시 던진 말이 있다. 요즘 요가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여자이지만, 애초에 요가는 인도의 남자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수련법이라고. 그러니, 우리에겐 여성적인 곡선의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현대 요가 중 하나가 바로 '오다카 요가'다. 물의 형상에서 착안해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 가미된 요가다. 처음에는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유행이람'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꽤 그럴싸 한걸.
그렇게 나는 혼자 집에서 유튜브에 '오다카 요가'를 검색해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배우 윤진서 님이 한국에 처음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처음에는 팔을 젓다가, 이내 척추로, 골반으로 흘러내리는 파도.
파도는 이제 온몸으로 흐르는 수많은 감정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억울함, 또 한편으로는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기쁨까지.
춤을 추고 싶어요
상담 선생님께 던진 말은, 다름 아닌 '춤'이었다. 아, 춤을 추고 싶다. 움직이고 싶다. 표현하고 싶다. 더 이상 갇혀 있고 싶지 않다,는 몸의 언어.
선생님은 기꺼이 춤을 추라고 했다. 솔직히 쪽팔렸다. 상담실에서 춤이라니. 혼자도 아니고, 선생님 앞에서...
"저도 같이 춰줄게요. 같이 춰봐요. 어떻게 움직이고 싶어요?"
용기를 내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다카 요가에서 배운 움직임을 이용해, 팔을 허우적거리고, 발레에서 뛰는 것처럼 총총 뛰어보다가, 현대 무용가가 된 듯 바닥을 쓸었다. 이 민망함. 어쩔 것인가.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절정. 체육 시간에 그리도 못했던 앞 구르기.
퍽-
소파에 어깨가 부딪히며 나의 춤은 끝이 났다. 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는 조용히...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다시 눈을 감아 볼까요? 지금 느낌이 어때요? 그걸 어떻게 표현해 볼 수 있을까요?"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에요.
음... 제 몸에서 파란색 꽃이 피어나고 있어요.
파란 꽃. 하늘처럼 새파랗고, 꽃처럼 만개하는. 그것이 내 온몸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핏줄 하나하나, 신경 하나하나가 열리기 시작했다.
트라우마를 앓았던 사람들에게 춤은 엄청난 치유의 효과가 있다. '세상은 위험한 곳이야'라는 믿음 아래 차단된 감각과 리듬감. 춤은 그 모든 것을 되돌려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지만 온 우주를 감싸 안고 있는 진동. 그것을 타고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흐를 수 있도록 말이다.
니체는 말했다. 우리는 낙타의 순종(해야만 한다, I should)과 사자의 명령(할 것이다, I will)을 넘어 어린아이의 자연스러움(I am)에 도달해야 한다고.
춤을 추듯 살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없는, 그저 흐르는 물처럼. 애초에 우리의 몸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여기에서, 눈앞에 주어진 모든 것에 흠뻑 젖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