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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Feb 09. 2023

수봉여관 골목 이 층집

희노애락의 유년시절

수봉여관 골목.

그게 나의 어린 시절 최초의 집에 대한 기억이다.

그전에는 다른 집에서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없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집은 수봉여관 골목길,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집의 이층이었다. 일층은 주인집이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듣고 이해했지, 그때에는 주인집 그런 개념도 없었다. 그냥 골목을 쭉 들어가면 파란색 대문이 나왔고 그 대문을 통과해서 또 골목처럼 생긴 좁다란 길을 쭉 따라 걸으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은 기억자로 한번 꺾이는데, 당시 4살이었던 나는 이곳을 열심히 오르내렸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3살 무렵 나는 이 계단에서 엉덩이로 내려왔다가 무릎으로 올라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맨날 엉덩이와 무릎이 까매져 있었다.


그 집에서 우리 오빠는 태권도를 다녔다. 오빠가 태권도를 다녀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 또래 남자애들이 그래서 그런 건지, 아무튼 우리 오빠는 골목대장까지는 아니고 골목 개구쟁이였다.

목에 빨간 보자기를 매고 슈퍼맨이라고 뛰어다니던 모습이 우리 오빠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이기도 하다.

오빠는 나랑 놀아주지 않았다. 골목에서 다른 친구들과 뛰어노느라 동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수줍음이 극도로 심했던 나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낙서를 하면서 흘끔흘끔 아이들 노는 모습만 쳐다보다가 집에 들어오곤 했다.


어느 날은 골목에 나갔는데, 애들이 하나같이 입에 하얀 막대를 물고 다녔다. 아빠가 맨날 피던 담배가 생각났지만 연기가 나지 않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고, 그냥 그걸 입에 물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하지도 않고 서랍에서 빨대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입에 물어봤다. 제법 비슷한 것 같았다. 그렇게 집안에서 빨대를 물고 인형놀이를 하다 보니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뭐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거야."

어린 마음에도 빨대 따위는 금세 잊혔다.

나중에 알았는데 아이들이 입에 물고 있던 것은 빨대가 아니고 막대사탕이었다.

그렇게도 나는 또래들과 어울리는데 미숙했다.


허구한 날 골목어귀에 나가 쭈그리고 앉아 아이들이 노는 것만 쳐다보던 딸이 불쌍했던지, 어느 날은 엄마가 골목입구 집에 있던 여자아이를 불러서 같이 놀라고 했다.

그 여자아이는 나를 자주 봤는지 아니면 붙임성이 좋았는지, 처음부터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줬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사귀게 되었던 기억이 꽤나 기분 좋았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름을 부르며 그 친구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80년대 당시에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사는 집이 없었다. 그 동네가 유독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이층 집으로 갈 때 통과하는 파란 대문도 항상 열려 있었고, 그 친구 집으로 들어가는 갈색 대문도 항상 열려 있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친구 집 대문을 열고 "누구야 놀자." 외치면 친구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거나 밖으로 나오곤 했다. 우리 오빠는 늘 이렇게 골목에서 친구들과 놀았는데, 나는 수줍어서 "누구야 놀자."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했더라도 아무도 듣지 못했을 거다. 그냥 갈색 대문을 밀고 들어가서 한참을 기웃대다 보면 누군가의 눈에 띄어 놀게 되거나 다시 골목에 나가 앉아 낙서를 하면서 친구를 기다렸다.


어느 날은 친구의 집에서 놀다가 그 친구가 자기 엄마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로 사탕을 사 먹었다.

사실 사탕이었는지 쫀득이였는지 달고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가 사준 걸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엄마는 엄청 화난 모습으로 나의 옷을 다 벗기고 화장실에서 엉덩이를 때리며 물로 내 몸을 빡빡 닦아냈다.

그러면서 도둑질은 나쁜 거라고 소리 지르는 말을 들으며 펑펑 울었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친구가 자기 엄마 돈으로 사준 거라고 혀 짧은 소리로 내뱉었지만 내 말은 전혀 엄마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그 친구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약간의 복수 같은 거였다.

여느 날처럼 갈색 대문을 밀고 들어갔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왁자지껄하는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현관을 보니 어린이들 신발이 현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생일파티인지 뭔지 모를 그런 분위기에 나는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노는 모습, 그리고 나를 도둑으로 몰았던 친구에 대한 미움 같은 것이 한꺼번에 올라와서 친구의 신발을 한 짝 찾아 대문 옆에 있던 변소에 넣어놓고 도망 왔다.

물론 변기 속에 빠트린 건 아니다. 그냥 변소 안 구석에 신발 한 짝을 잘 넣어놓은 거였다.

어린 마음에도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슴 두근거림과 약간의 짜릿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수봉여관 골목을 떠올리면 유년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항상 친구들이 노는 모습만 바라보던 미숙한 어린이의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 집순이가 된 이유에는, 물론 타고난 성향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그 골목길에서 놀던 나의 모습이 싫어서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싶은 방어기제 같은 게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파란 대문을 벗어나지 않고, 이층 마당만으로도 즐거웠으니까 말이다.

달팽이를 보거나 마당에서 빨간 대야에 물을 담아 오빠랑 물놀이하던 장면들이라거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느꼈던 수봉여관골목 이층 집에서 나는 참 많이 웃고 울었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 몸에 마치 더러운 게 묻은 것처럼 빡빡 닦아내던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다.

 모든것은 사랑이지만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는 그렇게 표현한것이라고.

얼마전 새언니와 오은영, 지나영 박사 이야기를 하는데 듣고만 있던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우리땐 그런걸 몰랐지. 요즘은 좋은 세상이다. 너네들이 애들 잘 키우고 있는거 봐라."

그래. 괜찮다. 우린 모두 미숙하니까.


이제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어졌지만,  아이들의 세상에서만큼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희노애락을 모두 즐겼으면 좋겠다.

인생에 어찌 분노와 슬픔이 빠질 수 있겠나.

분노하고 슬퍼하다보면 기쁘고 즐거운 일이 더 크게 느껴지는게 인생이니까 말이다.



80년대의 이해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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