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해 Feb 10. 2023

다정한 마음은 다정한 말로

우리 아빠는 참으로 쑥스러움을 많이 타시는 분이다.

나의 숫기 없는 유전자의 백 퍼센트는 아빠에게서 온 게 분명하다.


또 그는 다정하게 말하기가 서투신 분이다. 항상 툴툴거리며 말했고, 화가 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말하는 건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대물림 같은 거였다. 큰아버지도 우리 아빠 못지않게 불퉁불퉁 말씀하시는데, 같이 사시는 큰어머니도 그러셨다. 그러는 걸 보면 말습관은 쉽게 전염되고 타인에게 침투한다.

우리 새언니가 오빠에게 가장 불만인 것 중에 하나가 그 말하는 뽄새라고 한다. 가끔 시아버지(우리 아빠) 말투가 나오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속이 상한다는 말을 했다.

그때 언니를 위로하며 맞아, 우리 오빠가 말을 좀 그렇게 하지, 그런 생각을 했다.


큰 이모는 우리 아빠가 말할 때마다 엄마 귀옆에다가 속삭이신다. "이서방 화났냐?"

나도 어린 시절 선생님들께 화났느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말이 싫어 부단히 노력했던 적도 있다. 생글생글 웃으려고 노력했고, 사람들에게는 항상 친절하게 말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에는 친구들에게 '실실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 실실이는 집에만 오면 다시 무뚝뚝이로 변신하곤 했다.


엄마에게 함부로 말하는 게 나의 언어 습관 중에서 가장 고치고 싶었던 점이었다.

중학생 시절 나를 따라서 성당에 같이 다니고 싶다는 친구를 만나 우리 엄마랑 나랑 친구랑 성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 앞이니까 말을 많이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친구에게 한 마디 듣고 말았다.

"야, 너는 엄마한테 왜 그렇게 말하니? 친구들한테 말하는 거랑 다르네."

그 말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사실 그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못되게 말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엄마에게.

아빠가 엄마에게 말하듯이,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쉽게 형성된 말습관은 하루아침에 잘 고쳐지지 않는 법이라 나는 그 후로도 자주 엄마에게 불퉁불퉁 말하곤 했다.

나는 정말 못돼 먹은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나쁘게 말하는지, 속상했던 적도 많았고, 고치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유독 엄마에게는 말이 함부로 나왔다.




그래도 말만 그렇게 했지, 아빠가 실상은 엄마보다 여리시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우리 집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 동네 미끄럼틀에서 넘어져서 앞이빨이 부러지고 인중이 찢어졌다. 친구 엄마가 집에 전화해 주셨는데, 병원으로 달려온 사람은 엄마가 아니고 아빠였다. 인중을 두 바늘 꿰매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달고 있던 커튼을 계속 다셨다. 괜찮으냐, 말 한마디도 없어서 꽤나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다쳐서 병원에 있다는데도 엄마는 눈하나 깜짝 안 했고, 아빠만 발을 동동 구르며 달려오셨던 거다.


또 엄마가 시장에서 오빠 바지만 사 왔을 때, 내 건 없냐고 엉엉 울고 있으면 퇴근한 아빠가 내 손을 잡고 동네 문방구에 가서 "우리 애기 하나 골라라." 하시면 나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종이인형을 한 장 골라서 아빠 새끼 손가락을 잡고 언덕배기 낙원맨션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던 저녁을 기억한다.

딸내미 손잡기도 쑥스러우셨던지, 아빠는 내게 꼭 새끼손가락만 하나 내주시곤 했는데, 아빠 새끼 손가락을 내 다섯 손가락으로 부여잡고 걸으면 세상 두려울 게 없었던 마음이 들었다.


최근 나는 아이들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슬프고 속이 상했다. 다른 엄마들처럼 조금만 더 다정하게 말해주고 싶은데, 내 안의 불퉁거림이 자주 발현되는 걸 느끼게 되어 아이들이 잠든 밤이 되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든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대물림이 되는구나. 그런 깨달음 속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국 내가 노력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결국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의 제목처럼, 마음만으로 다정함을 발견해 내기에는 아이들은 너무 어리다. 내가 우리 아빠를 그렇게 기억하듯, 아이들이 훗날 "우리 엄마는 말은 그렇게 해도 다정한 분이셨어."라고 나를 추억하게 만드는 것은 슬픈 일이다.

말조차도 다정한 엄마로 기억되고 싶다.

이럴 때에는 나에게 이런 습관을 물려준 아빠가 원망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가 다정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 년에 몇 번 못 가는 친정이지만 갈 때마다 아빠는 많이 늙으신다.

그리고 이제는 툴툴거리면서 말하지도 않으신다.

그 특유의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야, 배추 가져갈래?" 하시면 나는 "어, 하나만 주세요." 하며 다른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를 한다.

그래도 쑥스러움으로 무장한 우리 부녀는 더 많은 이야기는 생략한다. 다만 이제 더 이상은 아빠의 표정이 화나 있지는 않다는 걸 발견했으므로, 나는 그 대물림을 끊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하겠다는 다짐만 해본다.

40년을 돌아, 말은 그렇게 해도 다정한 분이셨어, 라는 말은 우리 아빠 한 명으로 족하다.


다정한 마음은 다정한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수봉여관 골목 이 층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