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책장 Feb 14. 2023

도서상품권 백만 원어치

곧 십 주년 결혼기념일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결혼기념일에 소소하게 선물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의 셔츠나 카디건 따위를 사주었고, 그는 나에게 아무거나 하나 살 권리를 선물했다. 하지만 딱히 물욕이 크게 없는 나는 별로 뭘 사지 않았다.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빙자하여 4년 전에 크레마 그랑데 이북을 사서 잘 쓰고 있는데 그거 하나 기억난다.

사실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도 내 돈이니까 돈이 아까워서 뭘 살 수가 없다.


지난주에 남편이 동료들에게 결혼 십 주년에는 무엇을 선물해야 하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1위가 현금이었고, 2위는 명품가방이었다.

남편은 명품가방이라는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고 한다.

"아이고 우리 부인은 가방 같은 거 관심도 없어요."

"그럼 뭘 좋아하는데?"

"책 좋아하고.. 뜨개질 좋아하죠."

그랬더니 그 동료가 "그럼 백만 원어치 책을 사줘."

"악, 책을 백만 원어치를 어떻게 사요."

"그럼 백만 원어치 도서상품권을 사줘." 그랬다고 한다.

그러면서 도서상품권 백만 원이라니 너무 웃기지 않냐고 나에게 말하는데, 나는 고것 참 괜찮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금 백만 원은 생활비로 탕진할 것이 뻔한데 도서상품권이라면 내 책을 사는데 쓸 수 있지 않은가. 너무 혹했다. 하지만, 책을 사서 보는 돈도 아까운 나는, 에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지 무슨 책이냐, 하고 또 금세 마음을 접었다.


그러면서 대화와는 관계가 없는 말에 기분이 살짝 상해있는 나를 발견했다. 왜 내가 가방 같은 거에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물론 나는 명품가방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래도 내 평생 그런 거금을 주고 가방을 사는 일은 없지 싶다. 그래도 남편에게 '명품가방은 관심 없는 아내'가 되는 일은 별로인 것 같다.

나는 뭐 맨날 쭈글쭈글한 에코백만 들고 다니는 사람인가, 싶어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느낌도 들었다.

내돈내산은 못하는 소심이라 그렇지 누가 사준다면 굳이 마다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마치 예전에 엄마 생일에 고무장갑을 선물했다는 누군가의 일화가 떠올랐다. 우리는 간혹, 엄마는 고무장갑을 선물 받고 좋아할 거라는 착각을 하고 살지 않을까.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을 좋아서 한다고 착각한다.




최근에는 저학년을 자주 맡았는데, 1, 2학년은 통합교과에서 가족에 관련된 내용을 한동안 공부한다.

그런데 몇 년간 관찰해 본 결과, 아이들이 말하는 우리 엄마가 가장 잘하는 일의 대부분이 "요리"이다.

처음에는 "와, 너희 엄마 요리 잘하시는구나. 좋겠다." 그랬는데, 30명이면 28명이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하신다"라고 하니, 이거 믿을 만한 조사 맞나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작년, 우리 딸에 의해서 이것은 신빙성 제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딸아이는 우리 가족 칭찬 상장에 당당히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하신다"라고 써놨지 뭔가.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9년 평생을 같이 산 엄마를 몰라도 이렇게 한참 모르다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빨래 개는 일이고 두 번째로 싫어하는 일이 요리다. 세 번째는 걸레질.

요리를 잘한다는 뻥을 진짜처럼 믿고 있는 아이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엄마들의 세뇌인가 가스라이팅인가.

2022년 12월 22일에 당당히 집에 들고 온 칭찬상장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나를 이렇게 모르는데, 나는 타인에 대해서 얼마큼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남편은 내가 명품가방을 안 좋아한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명품가방이나 사줘 보고 말하라지.


그래도 조금은 혹했다.

명품가방 말고, 도서상품권 백만 원어치.






매거진의 이전글 다정한 마음은 다정한 말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